'나랏말싸미 법전과 달라'…낯선 한자어 가득한 민법

연합뉴스 2024-10-08 08:00:10

내일 한글날…38차례 개정에도 '우리말 순화' 안된 단어들 여전

법학 서적

(서울=연합뉴스) 최원정 기자 = '구거 기타 수류지의 소유자는 대안의 토지가 타인의 소유인 때에는 그 수로나 수류의 폭을 변경하지 못한다.'

우리나라 민법 제229조 1항에 적힌 내용이다. '구거'(溝渠), '수류지'(水流地), '대안'(對岸) 등 평소 접하기 힘든 낯선 한자어가 열거돼 있어 그 뜻을 한 번에 이해할 수 있는 시민은 많지 않다.

대학생 송예원(22)씨는 "첫 단어부터 해석이 안 된다"며 "더 쉬운 우리말로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싶다"고 했다. 직장인 최모(31)씨도 "일본어 아니냐"면서 "무슨 뜻인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해당 조항은 일상적인 표현을 사용해 '도랑이나 기타 물이 흐르는 땅의 소유자는 건너편 언덕이나 기슭의 땅이 타인의 소유인 때에는 그 물의 흐름이나 폭을 바꾸지 못한다'고 바꿀 수 있다.

578돌 한글날(10월 9일)을 앞두고, 의미조차 알기 힘든 한자어가 여전히 법전에 가득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민법은 법률행위는 물론이고 부동산, 금융 등 국민의 일상생활과 직접 연관된 분야를 다룬 법인데도 낯선 한자어 탓에 일반인이 접근하기 힘들다.

'몽리자'(蒙利者), '포태'(胞胎), '후폐'(朽廢) 등과 같은 한자어도 민법에 자주 등장하는데, 각각 '이용자', '임신', '낡아서 쓸모없게 된'으로 바꿔쓸 수 있는 말들이다.

'수류지'를 비롯해 둑을 뜻하는 '언'(堰)은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도 수록되지 않은 일본식 한자어다.

학계는 1958년 민법 제정 당시 조문 1천118개 중 약 60%가 일본 민법전의 조문을 직역해 만들어졌다고 보고 있다.

이후 민법은 현재까지 모두 38차례 개정됐으나 우리말 순화 작업을 거치지 않은 한자어가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

한국법제연구원의 '2023년 국민법의식 실태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3천400명 중 절반이 넘는 52.4%가 '법률 용어는 국민이 이해하기 어렵다'고 답했다.

보고서는 "학력이 낮고 주관적 계층 수준이 낮을수록 법률 용어에 대한 이해도가 낮아지는 것을 알 수 있다"며 "어려운 표현보다는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용어로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장래 법조인을 꿈꾸는 법학전문대학원생들도 생전 처음 보는 한자어를 이해하지 못해 난감해하기 일쑤다.

오병철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한글로 '언'이라고만 적어놓으면 학생들은 무슨 의미인지 전혀 모른다"며 "'의사표시'와 '계약' 등 일상적으로 통용되는 한자어는 바꿀 필요가 없지만 '몽리자'나 '언'처럼 우리말로 충분히 바꿀 수 있는 법률용어들은 우리말로 표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법제처는 2006년부터 '알기 쉬운 법령 만들기' 사업을 통해 현재까지 2천500건이 넘는 법률과 하위법령을 정비했으나 민법과 같은 기본법에는 쉽게 손대지 못하고 있다.

법무부는 법제처가 마련한 정비안을 토대로 19·20대 국회에서 용어를 쉽게 바꾼 민법 개정안을 발의했으나 모두 임기 만료로 자동 폐기됐다.

법제처 관계자는 "민법은 국민 생활에 미치는 영향이 큰 법률이기 때문에 개정에 신중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다"며 "관계 기관들의 입장을 듣고 다양한 지적을 반영해서 추가 발의를 추진하려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바뀌는 표현이 기존 법률용어의 의미를 왜곡하지는 않는지 신중히 살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국민이 한눈에 알 수 있는 법조문을 만들도록 노력해야겠지만 모든 한자어를 풀어쓰는 것이 대안은 아닐 것"이라며 "섣불리 다른 말로 풀어쓴다면 수십 년 동안 대법 판례와 법학자의 연구 등으로 확정된 개념이 일그러질 수도 있다"고 했다.

away777@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