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가가 뽑은 좋은 수필-31] 나윤옥 '친밀하게 바라보는 사물은 그 시선에 응답한다'

데일리한국 2024-10-07 23:06:31
나윤옥 문학평론가 섬네일. 사진=데일리한국DB 나윤옥 문학평론가 섬네일. 사진=데일리한국DB

소설과 수필은 대표적 산문문학이나 그들이 보여주는 세계의 폭은 다르다. 수필이 허구가 아닌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는 점, 그리고 길이가 짧은 글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폭이 작품의 빛이나 깊이를 가늠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이러한 수필의 특성에도 서정성을 넘어 서사적 수필을 지향하는 이들이 많다. 

서사란 인간의 삶을 면면히 이어주는 단단한 끈이라고 할 수 있다. 삶의 이야기들이 전해지며 인류는 흘러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길이가 짧은 수필이 서사성을 갖추기란 만만한 일이 아니다. 서사의 골격을 갖추지 않았더라도 작품의 어느 한 문장에서 번쩍, 작가의 응축된 '내적 서사'를 느낄 수가 있다. 하나의 단어에서도 삶을 바라보는 작가의 눈과 그의 삶의 역사를 짐작해 본다. 이것을 수필에서 맛보는 서사성이라고 해도 될까? 권경자의 을 읽으면서도 그런 서사성을 느꼈다. 

어느 날 작가는 아파트 베란다 유리창에 검은 나비가 붙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지난여름, 작은 정원으로 꾸며놓은 베란다의 나뭇잎에 벌레가 갉아 먹은 흔적을 보고 의아하던 참이었다. 화분의 흙 속에 있던 애벌레가 몇 년을 혼자서 견디어 내 성충으로 변한 것일 거라고 추측하며, 어둡고 험난한 긴 시간을 견디어 나비가 된 것을 대견해 한다. 베란다 정원은 작은 생명들이 살고 있는 그들만의 세상이기도 하다. 짝을 잃고 우는 귀뚜라미도 있고, 민달팽이가 축축해진 흙을 뚫고 나오기도 하는 곳. 

퇴계 이황의 16대 종손인 이근직의 별세 소식을 접하면서 작가는 베란다의 검은 나비를 떠올렸다. 한 해 전 가을에 '퇴계 종택'을 찾았을 때, '조복(造福)'을 말해주던 92세의 이근직 어른. 그에게서 종손으로서 전통을 이어가기 위해 꼿꼿하게 살아온 기개를 느꼈었다. 귀가 거의 들리지 않는 분이었으나 아랑곳하지 않고, '조복'을 위해서는 사람과의 관계, 그리고 그 관계를 위해서 '말(言語)'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준 분이었다. 

최근 눈의 피로감을 핑계로 책을 놓고 있었던 작가는, '깨진 유리창론'-조그마한 무질서와 하찮은 실수, 별것 아닌 것 같은 유혹이 사람을 황폐화하는 요인이 된다-을 떠올린다. 이대로 멈춰있다가는 자신의 삶에 쓰레기가 쌓여갈 것이라는 생각에, 깨지기 쉬운 내 안의 유리창을 잘 닦아나가리란 결심을 한다. 

미물들의 생명력을 눈여겨 본 작가. 꼿꼿하게 살아온 종손의 모습. 그들을 통해 자신의 삶을 지켜 나가려는 내면의 서사가 은은한 빛을 발한다. 작가를 통해 검은 나비, 귀뚜라미, 민달팽이들을 보노라니 한 철학자의 멋진 말이 떠오른다.  "친밀하게 바라보는 사물은 그 시선에 응답한다"

◆나윤옥 주요 약력

△강원도 춘천 출생 △'한국수필' 수필 등단(2005) △'인간과문학' 평론 등단(2020) △평론집 '작은 눈으로 읽는 서사 수필' 출간(2024)

♣깨진 유리창 론-글/권경자

산들바람이 불어오는 지난 가을쯤이다. 베란다에서 우연히 눈을 드니 이상한 검은 물체가 유리창에 붙어 있는 것이 아닌가. 순간 두려움으로 소름이 꽉 돋는 느낌이었다.

베란다는 좁은 공간이지만 대부분 식물로 꽉 차 있는 푸르른 곳이다. 잎이 큰 나무는 천정까지 뻗어있고 이것저것 오다가다 하나둘씩 사 모은 화분 속으 식물들은 사람 키 높이까지 자라났다. 잎도 얼굴을 가릴 정도로 넓어졌다. 작은 식물, 꽃식물도 있어 거의 돌보지 않고 물만 주는데도 햇빛과 바람 덕분인지 철 따라 예쁜 꽃도 피워준다. 작은 정원 역할을 하는 셈이다.

자세히 살피니 검은 나비다. 지난여름 나뭇잎에 벌레가 갉아 먹은 흔적이 있어 의아했었는데 이놈인 모양이다. 작년에는 새로 들여놓은 화분도 없었는데 어디서 애벌레가 나왔을까? 곰곰이 생각하니 아마 나비의 알이 몇 년을 화분의 흙 속에서 견디다가, 어느 날 혼자서 자라 저런 성충으로 변하지 않았나 추측이 된다.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나니 나비가 살아왔을 험난한 시간, 한 순간도 방심하지 않고 절망하지도 않으면서 매일 조금씩 자라왔을 그 순간들이 대견하면서도 명치끝이 아련히 아파져 오는 고통이 느껴졌다.

어느 해인가 밖에서 돌아오니 거실에서 귀뚜라미가 한 마리가 갈팡질팡 뛰고 있었다. 너무 놀라 어디서 왔는지 생각지도 못한 채 신문지를 넓게 펴서 그 위에 뛰고 있는 귀뚜라미를 겨우 올리고 바깥으로 내 보내 주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자, 베란다에서 귀뚜라미가 울기 시작했다. 한 마리가 더 있었나 보다. 낮에도 울고 밤에도 울었다. 귀뚜라미 소리가 얼마나 절절한지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애달픈 소리가 나를 원망하는 듯이 이어졌다. 어디서 왔을까? 두 마리씩이나 밖에서 들어온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역시 어느 화분 흙 속에 숨어있던 알이 부화하여 애벌레가 되고 성충이 된 모양이다. 같이 동고동락했던 한 마리가 없어졌으니 어찌하나. 그 해는 조바심으로 가슴이 죄어들어 가을이 가기만을 간절히 기다렸다.

가끔 물을 주고 난 다음, 바닥이 흥건해지면 흙 속에 있던 민달팽이도 기어 나온다. 그때마다 화들짝 놀라곤 하지만 지금은 그냥 한 베란다 식구로 받아들이고 있다. 어저께 신문 한 귀퉁이에서 '퇴계 이황 16대 종손' '이근필' 별세라는 기사를 읽는 순간 베란다에 있던 검은 나비 생각이 났다.

작년 늦은 가을, 물안개 피어오르는 안동호를 지나 '퇴계 종택'을 찾았을 때 92세인 종손께서는 어린아이처럼 설레어 하며 우리 일행을 맞아주셨다. 하늘은 맑고 푸르고, 청청한 소나무 사이로 청량한 가을바람이 부는 한적한 곳에서 종택은 회색빛으로 갑자기 눈앞에 드러났다. 그것에서 허리가 구부정하고, 머리가 허연 나이 많으신 어르신이, 얼굴에도 몸에도 살점이 하나도 없이 육화된 듯한 모습으로 나타났을 때, 갑자기 여기가 어디인가 가늠할 수 없어 숨이 턱 막혀 왔었다. 그분이 종손이셨다.

투명한 피부 아래로 미소를 띠시면서 열성적으로 '조복(造福)합시다'라고 사람들에게 복 짓는 방법을 말씀하셨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말(言語)라고 누누이 강조하셨다. 한마디의 말이 씨앗이 되어 사람과 사람 사이를 거북하게 하고 드디어는 단절하게 하는 첫걸음이라고…. 귀가 거의 들리지 않는다고 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치 할아버지가 다 큰 자식에게 귀담아듣지 않을 줄 알지만 그래도 꼭 해주고 싶은 말, 해주어야 할 말이 있다는 듯 사명감이 표정에서 오롯이 드러나 보였다. 종손으로서의 전통을 이어가기 위해 홀로 꼿꼿하게 살아 온 긴 세월이었으리라. 그 여정이 온 몸으로 고스란히 느껴졌다. 종손은 베란다에 나타난 검은 나비처럼 고고하고 외경스러웠다.

미국의 범죄학자 제임스 윌슨과 조지 캘리이 주장한 깨진 유리창 이론이 생각난다. 어느 날 동네 불량배가 제과점 유리창에 돌을 던지고 달아났다. 가게주인이 놀라 달려 나가보니 피해가 별로 크지 않아 깨진 유치창을 종이로 적당히 가리고 그냥 넘어갔다. 얼마 후 지나고 보니 그 앞에 쓰레기가 쌓이고 낙서가 생겼다고 한다. 그러자 손님이 점차 줄고 제과점 주변은 쓰레기가 더 쌓여 무법천지가 되어 버렸다는 이론이다. 조그마한 무질서와 하찮은 실수, 별것 아닌 것 같은 유혹이 사람을 황폐화하는 요인이 된다고 한다.

근래의 내 생활도 깨진 유리창처럼 변하고 있는 모양이다. 눈이 아파 제대로 활자를 볼 수 없어진 이후로 책을 조금씩 멀리했다. 활자가 주는 피로감으로 신문이나 잡지마저 그냥 지나치기 일쑤였다.

그랬더니 이젠 읽지 않고 지나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다. 어떤 단어는 일주일 만에 겨우 생각해 낸 적이 있을 정도다. 감정도 단순해진다. 한 가지 감정에 매달리면 도무지 벗어날 수가 없다. 마음속에 조금씩 생긴 쓰레기가 이제는 산더미를 이룬 모양새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은 글쓰기를 즐거운 고통(pleasant Agony)이라고 했으나 이런 상태에서는 그냥 고통(Agony)일 뿐이다.

미물인 나비도 귀뚜라미도 매일 매일의 힘든 일정을 그대로 지키면서 살아간다. 혼자서 알에서 깨어나고 혼자서 자라 성충이 된다. 힘이 든다고 포기하지 않는다. 쓰레기를 만들지 않는다. 그런데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인 나는 매일 조금씩 쓰레기를 만들다가 그 쓰레기 더미에 갇혀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형세다.

봄이다. 꽃들은 저마다 다투어 피어나고 있고 나무들은 온통 수액으로 벙글어 있다. 어느 부분을 건드려도 무언가 생명이 튀어나올 것만 같다.

이 봄, 나도 이 쓰레기 더미에서 벗어나고 싶다. 나무처럼 벙글어지고 싶다. 온 몸에 수액이 돌게 하고 싶다. 나무처럼 벙글어지고 싶다. 온몸에 수액이 돌게 하고 싶다. 이제 탈피를 해야겠다. 하루라도 좋으니 나비가 되어 날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