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 한마디 못듣고" 日강제동원 피해자 김성주 할머니 발인

연합뉴스 2024-10-07 16:00:35

일본 전범기업 대상 소송 내 2018년 대법원서 승소하기도

"일본의 사과 한 마디 못듣고…"

(광주=연합뉴스) 김혜인 기자 = "돌아가실 때까지 일본의 사죄도 받지 못한 어머니의 삶이 자식인 제게도 한이 됩니다."

7일 광주 북구 효령동 영락공원에 김성주 할머니의 영정을 따라 검은 상복을 입은 유족과 추모객들이 모였다.

일본으로 끌려가 강제 노역을 당한 뒤 향년 95세의 나이로 전날 세상을 뜬 김성주 할머니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전남 순천에서 태어난 김 할머니는 일제강제동원의 사과와 배상을 받기 위해 험난한 소송에 나선 할머니들의 상징과 같았다.

14살이 되던 1944년 5월 일본인 담임 선생님의 권유와 강압에 못 이겨 일본으로 건너갔고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항공기제작소 공장에서 가혹한 노역에 시달리며 왼쪽 검지 손가락이 잘리는 등 여러 수모를 겪었다.

1944년 12월 7일 도난카이 지진에서 겨우 살아났지만, 발목을 크게 다쳤고 해방 후 귀국해서는 주위의 멸시까지 받으며 한평생 고통받았다.

영면에 든 일제강제동원 피해자 김성주 할머니

고인은 2012년 일본으로부터 사과와 배상을 받기 위해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광주지방법원에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고, 6년여 만에 2018년 11월 대법원에서 승소했다.

그러나 정부의 회유에 기존 입장을 바꿔 지난해 5월 정부에서 대신 지급하는 배상금을 수용하며 미쓰비시중공업 특허권 압류도 취하하기도 했다.

소송을 도왔던 이국언 일제강제동원 시민모임 대표는 이날 "주변의 오해와 편견에도 불구하고 가해자 일본 정부와 미쓰비시 중공업을 상대로 길고 긴 소송 과정에서 누구보다 용기 있게 싸웠다"며 일본 소송지원단으로부터 온 편지를 나지막이 읊었다.

추모의 시간이 지나고 운구차에서 관이 옮겨지고 화장장으로 향하자 곳곳에서 울음소리가 터지며 고개를 떨궜다.

김 할머니의 큰아들 문병창(74) 씨는 "결국 일본에서 사과 한마디 듣지 못한 채 가셨다"며 "그곳에 가셔서는 속상하고 억울했던 마음이 다 풀리길 바란다"고 말했다.

고인의 유해는 광주 모 추모관에 안치된다.

in@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