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오페라 역사 새로 쓴 대구오페라하우스 '장미의 기사'

연합뉴스 2024-10-05 10:00:22

'제21회 대구국제오페라축제'서 개막 공연…객석에 마법을 걸다

오페라 '장미의 기사' 공연 장면

(대구=연합뉴스) 이용숙 객원기자 = 지난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엘렉트라'를 국내 초연한 대구오페라하우스(관장 정갑균)가 이번에는 슈트라우스 오페라 중에서도 가장 공연하기 어려운 '장미의 기사'에 도전했다.

4일 저녁 공연된 '장미의 기사'는 두 번의 휴식 시간을 포함해 세 시간 반이 넘는 긴 공연 시간에도 막이 끝날 때마다 관객의 반응은 열광 그 자체였다.

지난해 '엘렉트라'로 디오오케스트라를 이끈 에반-알렉시스 크리스트가 지휘봉을 잡은 것이 이번 공연을 성공으로 이끈 첫 번째 요인이었다. 황홀한 밤을 보내고 맞이한 아침을 표현하는 1막 오케스트라 도입부부터 크리스트는 엄청나게 복잡한 리듬과 격렬한 템포를 환상적으로 소화하며 관객을 곧장 음악에 몰입시켰다. 어려운 연주로 인한 피로가 누적된 탓인지 금관 파트는 비교적 잦은 실수를 보였지만, 그로 인해 전체적인 완성도가 크게 떨어지지 않을 만큼 전반적인 음악 진행이 견고하고 매혹적이었다.

오페라 '장미의 기사' 공연 장면

성공의 두 번째 요인은 출연진의 경이로운 기량이었다. 1996년 서울시립오페라단(현 서울시오페라단)이 초연한 이후 거의 30년 만에 성사된 이번 '장미의 기사'의 출연진을 전원 한국 성악가들로 꾸렸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여주인공 '마샬린' 역의 소프라노 조지영은 이 배역을 처음으로 노래하는데도 안정적인 발성과 역할의 개성을 살린 음색으로 카리스마와 불안을 함께 지닌 캐릭터의 존재감을 뚜렷이 드러냈다.

긴 공연 시간을 전혀 지루하지 않게 만든 일등 공신은 '바론 옥스' 역의 베이스 박기현이었다. 독일 할레 오페라하우스의 종신 솔리스트인 그는 이미 이 배역으로 독일 현지 언론의 격찬을 받은 바 있다. 무대 위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감당하면서도 박기현은 자연스러운 호색한 연기로 관객에게 끊임없는 즐거움을 안겨주었다. 속사포처럼 빠른 템포로 가사를 소화해내는 그의 정확한 발음과 유연한 가창도 관객의 몰입도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서른두 살의 '마샬린'과 은밀한 사랑을 나누는 17세 귀족 청년 '옥타비안'을 연기한 메조소프라노 김선정은 원숙한 경력을 뒤로 하고 무대 위에서 실제로 사랑에 빠진 앳된 청년의 모습을 보여줘 극의 현실성을 높여주었다. 김선정은 맑고 신선한 가창과 시시각각 변하는 섬세한 표정 연기로 관객을 설득했다.

오페라 '장미의 기사' 공연 장면

돈으로 귀족이 되려는 부르주아 상인 '파니날' 역의 바리톤 권성준은 깔끔하고 정돈된 발성, 정확하고 밀도 있는 가창, 단호한 음색으로 선명한 존재감을 보였다. 소프라노 이혜정은 '파니날'의 뜻으로 '바론 옥스'와 정혼했다가 젊은 '옥타비안'과 사랑에 빠진 15세 소녀 '소피'에 적역이었다.

2막에서 혼인의 전령으로 찾아와 은장미를 전해주는 '옥타비안'과 첫눈에 반하는 순간, 이혜정은 모두가 기대하는 바로 그 청아한 음색과 투명한 고음으로 초지상적인 기쁨을 표현해 첼레스타가 함께 하는 마법의 순간을 영롱하게 빛냈다. 3막 주역 가수들의 3중창과 2중창의 오묘한 음색 조화는 이 공연의 압권이었다.

단 한 번 등장하지만 가장 어려운 아리아를 아름답게 불러낸 '이탈리아 테너' 역의 테너 김효종, 희극적 개성을 십분 발휘한 '발자키' 역의 테너 유호제와 '안니나' 역의 메조소프라노 이아름, 그 밖의 조역 및 단역들의 훌륭한 가창과 연기도 극의 활력을 더했다. 특히 무대를 채우며 바쁜 움직임을 소화한 대구오페라콰이어 단원들은 극 중 다양한 단역들을 연기하기도 했다.

오페라 '장미의 기사' 공연 장면

김현정의 무대디자인은 단순하면서도 인상적이고 효율성이 높았다. 1막에서 곡선의 하부 받침 구조와 계단, 커다란 샹들리에로 꾸민 무대는 '마샬린'의 침실과 거실로 유용하게 쓰였는데, 2막 '파니날'의 집에서는 이 구조 위로 덮개 형태의 곡선 구조물이 내려와 장미 형상을 만들었고, 주인공들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 순간 그 위에 영상을 쏘아 붉은 장미를 완성했다.

이재희가 디자인한 벨 에포크 시대 의상은 아름다운 형태와 색조의 조화로 눈을 즐겁게 했다. 테너 조란 토도로비치의 연출은 전체적인 극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았고 군중 장면은 역동적으로 진행되었다.

다만 주역 가수들이 빈 무대에서 중창을 노래하는 여러 장면은 지나치게 정적이었고 열정적 포옹 장면에서도 인물의 욕망이 표현되지 않는 등, 전반적으로 세심한 연출적 장치는 부족했다.

rosina0314@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