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40] 천상천하 유아독존...가요계 피로 물든 '폭력사건'

데일리한국 2024-10-03 19:55:56
나훈아(왼쪽)와 너훈아 모습. 사진=방주연 제공 나훈아(왼쪽)와 너훈아 모습. 사진=방주연 제공

나의 전성기 시절에 라디오 DJ를 한 적이 있었다. 청취율이 고공행진을 하던 어느 날인가? 매일 같이 괴기스러운 협박 편지와 소포가 날아들기 시작했다. 처음 며칠은 그냥 장난치려는 것이려니 생각했다. 발신지 발신자가 없는데 협박 편지였는지 글씨는 왼손으로 쓴 것같이 삐뚤빼뚤했다. 딱히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방법이 없어 황당했다. 그래서 생방송으로 진행하던 방송을 일주일분씩 녹음해서 방송을 이어갔다. 

협박 내용은 앞뒤가 없고 단순한 문장으로 흉측하고 피로 쓴 문구였다. 때로는 피가 묻은 과도도 들어있었다. "너를 죽여 버리겠다" "네 집 앞에 칼 들고 갈 거다. 기다려라" 담당 PD도 나도 오싹함, 위태로움, 그 자체였다. 어쩔 수 없이 경찰에 수사 의뢰를 했다. 라이벌 가수 쪽의 짓이 아니면 나를 죽이고 싶을 정도의 그 누구의 짓일 것이다. 수사기관은 수사 상황을 공개하자고 했다. 

하지만 "칼 들고 네 집 앞으로 가겠다"는 그 협박범은 온전한 정신 상태가 아니라는 판단으로 가족들에게 해코지할 수 있었기에 비밀리에 수사를 진행했다. 한참 후 수개월간의 협박이 멈추긴 했지만 너 죽고 나 살자는 폭력성에 노출되었다는 강박감은 죽을 맛이었다. 한동안 사설 여자 경호원을 대동하고 다녀야 하는 지긋지긋한 불편함을 겪었다. 

나훈아는 감성이 충만한 노래로 트로트 팬들의 우상이다. 1972년에 서울시민회관에서 공연하던 중 한 남자에게 깨진 소주병 파편으로 습격을 당해 긴 시간 입원을 한 적이 있다. 이 소식을 들은 나훈아의 팬들 사이에서 남진의 팬이 라이벌 의식에 나훈아를 테러했다는 루머가 돌았었다. 팬클럽끼리 서로 패싸움을 벌이기도 했지만, 양측 모두 사실을 부인하면서 일단락되었다.

방주연(왼쪽부터), 나진기, 문정선 모습. 사진=방주연 제공 방주연(왼쪽부터), 나진기, 문정선 모습. 사진=방주연 제공

건강을 회복한 뒤 1973년 공군에 입대(방위)했다. 배우 고은아의 사촌인 예쁜 미모를 가진 이숙희와는 사실혼이었다. 전역을 1년 앞둔 1975년에 이혼했다. 호소력 짙은 목소리와 특유의 꺾기 창법은 닮은꼴 가수 너훈아, 나운하, 이운아, 이종배가 생겨났고, 사촌 동생 나진기도 창법이 흡사하다.

약 3000여 곡을 취입하고 200여 개의 앨범을 발표, 작사, 작곡한 노래는 약 1200여 곡 이상으로 추정이 된다. 2007년 3월, 세종문화회관에서의 콘서트가 취소되고 2006년 순회 콘서트가 마지막 활동이 되었다. 2017년에 '남자의 인생'을 발표, 11년 만에 가요계에 복귀했다. 2020년 코로나19 여파로 온택트(영상 대면) 시대를 맞아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 콘서트를 KBS 2TV에서 방송했다. '한국 가요계의 살아 있는 전설' 그야말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되었다. 

배우 지망생이던 남진은 약 2년 정도 '한동훈 음악학원'에서 트레이닝을 받으면서 1965년에 '서울 플레이보이'를 발표하면서 가수로 데뷔했다. 그때 팝 장르의 노래는 별 반응은 없었다. 어머니가 즐겨 불렀던 트로트 곡 '울려고 내가 왔나'가 처음으로 히트, 일찌감치 트로트로 전향했다. 1967년 히트곡 제조기였던 작곡가 박춘석의 '가슴 아프게'를 부르면서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다.

1967년에 박상호 감독의 영화 '가슴 아프게'에 주연으로 출연하면서 영화배우로도 활동했다. 장일호 감독 영화 '그리움은 가슴마다'에 주연으로 출연, 국도극장에서 개봉하여 약 10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지방에서도 폭발적인 흥행 기록을 올렸다. 1968년 해병대 청룡부대(해병 2여단)에 입대,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었는데, 정부의 긴급조치로 강제로 입대한 것으로 알려졌다.

1980년, 신군부의 등장과 함께 정치적 탄압을 받았다. 이 시점부터 가수 활동을 접고 재혼과 동시에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몇 년간 미국에서 지내다가 1982년에 귀국해 '빈 잔'을 발표했다. 그렇지만 약 3년간의 공백으로 가요계의 기류는 많이 달라졌다. 수많은 후배 가수가 등장했고 예전처럼 큰 인기를 많이 얻지는 못했다. 1985년에 고향인 목포로 내려가 유흥업소를 운영하기도 했다.

방주연 모습. 사진=방주연 제공 작년 가요스타쇼 출연 시 방주연 모습. 사진=방주연 제공

업소를 운영하던 중에도 서울 타워 호텔 나이트클럽(11월)에도 출연했는데 주차장에서 동향의 조직 폭력배의 기습 공격으로 중상을 입었다. 몇 차례의 대수술을 받은 적이 있다. 지역 세력 간의 다툼이 원흉이었다. 휴식기에 접어들었다. 요즘은 종합편성 채널의 트로트 신인가수들을 심사하는 모습으로도 활동 중이다.

하늘은 모든 것을 주지 않는다. 권력자, 유명인, 저명한 사람은 많은 사랑과 명성을 얻고 물질을 얻는다. 유명인에게 날아드는 협박성, 폭력성은 내려놓음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는 교훈이기도 하다. 조용남의 그림 소송과 환불 사태에서 느낀다. 화투짝 놀이는 이기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때로는 져주기도 하면서 상대의 주머니와 마음을 넉넉하게 채워주는 훈훈한 마당을 펼치기도 해봄이 어떨까? 

내가 후배들에게 당했던 사기 사건을 생각해 본다. 배려, 나눔의 뜻을 알고 주변을 돌아보면서 인기에 연연하기보다는 큰마음의 참 어른이 되라는 뜻이라고 생각해 본다. 

◆ 방주연 주요 약력

△1970년 '슬픈연가'로 데뷔 △'당신의 마음' '자주색 가방' '기다리게 해놓고' '꽃과 나비' '정' 등 히트곡 다수 △1973년부터 4년 연속 동양방송(TBC) 7대 가수상, 최고가수상 △KBS MBC 10대 가수상 수상 △대한민국 가수 희망시대 △한국가수협회(예총1969년 설립) 여성가수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