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azine] 월출산과 영산강이 만나면, 영암 ①

연합뉴스 2024-10-03 10:01:23

달 달 하잖아…월출산

(영암=연합뉴스) 현경숙 기자 = '달이 뜬다 달이 뜬다/ 영암 고을에 둥근달이 뜬다/ …/월출산 천황봉에 보름달이 뜬다'.

대표적 지역 아리랑 중 하나인 '영암 아리랑'이다.

이를 부른 가수 하춘화는 당시 17세의 나이로 일약 스타 반열에 올랐다.

그만큼 전남 영암과 월출산(해발 809m)은 대중의 뇌리에 각인됐다.

◇ 달 뜨는 산·아침 하늘의 불꽃

월출산은 이름처럼 산봉우리에 달이 걸리면 환상의 세계인 양 아름답다.

월출산은 태백산맥에서 갈라져 나온 소백산맥의 한 줄기가 한반도 서남해안을 향해 뻗어 내리다 영암 평야에서 우뚝 솟은 바위산이다.

경사가 급하고 산세가 험하지만, 바위 봉우리 하나하나가 웅장하면서도 한 떨기 꽃송이처럼 기품이 있다. 달을 제일 먼저 맞이한다고 해 월출, 월나, 월생 등의 이름이 붙여졌다.

조선의 인문 지리학자 이중환은 저서 '택리지'에서 월출산을 '화승조천'(火昇朝天)이라 했다. 아침 하늘을 오르는 불꽃 같은 기상을 가진 산이라는 것.

가을 단풍이 산객을 매료하는 설악산이나 한반도 최고 명산으로 꼽히는 금강산보다 절경이라는 월출산은 예부터 작은 금강산이라 불렸다.

박복용 영암 문화관광해설사 협회 회장은 북쪽의 금강산은 우리가 갈 수 없는 꿈의 산이지만 "월출산은 우리가 갈 수 있는 금강산"이라고 강조했다.

◇ 하늘 아래 첫 부처

월출산에는 땅에서는 가장 멀고, 하늘에서는 제일 가까운 부처님이 있다.

국보인 영암 월출산 마애여래좌상이다. 월출산 제2봉인 구정봉(711m)에서 가까운, 600m 고지의 거대한 암벽에 새겨진 여래좌상은 '하늘 아래 첫 부처'로 불린다.

불상은 전체 높이 8.6m, 신체 높이 7m로, 서해를 그윽하게 바라보고 있다. 항해하는 배들의 안전을 보살피는 듯한 눈길이다.

깊은 산중 가파른 바위에 어떻게 이 같은 거불이 조각됐을까 싶은 경이를 자아내는 불상은 네모진 얼굴에 반쯤 뜬 눈을 하고 있었다.

손은 어떤 중생의 아픔도 어루만지고 위로해줄 듯 부드럽게 느껴진다. 근엄해 보이지만 무섭지 않은 얼굴이다.

마애불에서 100∼200m 떨어진 곳에 삼층석탑이 자리 잡고 있었다.

큰 자연석을 기단으로 삼은 삼층석탑은 나무가 울창한 계곡 너머로 마애불을 바라보고 있다. 경건하고 간절한 신앙심을 불러일으키는 배치가 아닐 수 없다.

탐방객이 마애불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영암군과 월출산국립공원사무소는 지난해 새 탐방로 '하늘 아래 첫 부처 길'을 조성해 개통했다.

길은 월출산기찬랜드에서 시작해 대동제를 지나 용암사지에 이른다. 거리는 약 5㎞이다. 이전에는 훨씬 먼 길을 돌아서 가야 했다.

◇ 천황봉과 구정봉

하늘로 솟구친 기암괴석을 오르는 것은 월출산만이 선사하는 등산의 참맛이리라.

월출산에 들어서면 크고 작은 천태만상의 바위가 발걸음 옮길 때마다 덥석덥석 다가오는 듯하다. 주중, 주말 할 것 없이 산객이 끊이지 않는 이유이다.

최고봉인 천황봉은 통일신라시대 이래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천제단이 있었던 성소이다.

'삼국사기'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는 '나라와 백성의 평안을 빌며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설명이 나온다. 발굴 조사 결과 실제로 접시, 사금파리, 향로 등 제사와 관련된 유물이 발견됐다.

천황봉에 서니 자로 그은 듯 반듯반듯하게 경지 정리된 영암평야의 벼가 정겹고 들판 중간중간에 옹기종기 들어앉은 소백산맥의 여맥이 밀려오는 파도처럼 감동을 안긴다.

구정봉은 거대한 하나의 바윗덩어리 같았다. 바위 표면에는 눈, 비, 바람에 침식되고 패인 웅덩이 9개가 있었다.

구정봉 이름의 유래이다. 이 봉우리 정상에 닿으려면 한 사람이 겨우 드나들 수 있는 바위 사이 구멍을 통과해야 한다.

정상에는 바람이 거셌다.

웅덩이에 개구리들이 살고 있었다. 바위 색과 비슷한 보호색을 띠고 있어 눈에 잘 띄지 않았지만 보통 개구리 크기였다.

손톱만큼 작은 개구리도 두어 마리 있었다. 작열하는 태양이 웅덩이를 비추고 있었다.

물이 마르면 개구리들은 어떻게 될까. 700m 고지의 바위 꼭대기에 사는 개구리는 생명의 신비를 되돌아보게 했다.

천황봉과 구정봉은 약 1.6㎞의 능선으로 이어져 있다. 골짜기를 흐르는 바람이 세찬 바람재가 중간에 있다. 바람재에서 천황봉에 이르는 약 1㎞ 구간은 가파른 오르막의 연속이었다.

파란 하늘 아래 서 있는 정상의 실루엣이 너무 선명해 단걸음에 닿을 것 같은 착각이 일었지만 무거워진 발걸음을 한 발 한 발 옮기는 것 외 고행에서 벗어날 길은 없었다.

탐방이 힘들었지만, 구정봉에서 천황봉에 이르는 능선은 기기묘묘한 바위 군상이 이룬 자연 조각 공원을 감상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탁월한 여정이었다.

사방에 우뚝우뚝 솟은 기암괴석들은 합창하는 듯, 서로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듯 향연을 벌이고 있었다. 천상의 바위 예술관이라는 별명이 무색하지 않았다.

천황사탐방지원센터에서 천황봉으로 오르는 길은 월출산 최고봉에 이르는 짧은 경로 중 하나로 많은 탐방객이 찾는다.

거리가 짧은 만큼 경사는 급하다. 탐방의 노고를 덜어주기 위해 구름다리가 설치돼 있다.

다리 아래는 아찔한 협곡이다.

월출은 천황, 구정 외에도 사자봉, 도갑봉, 주지봉, 향로봉, 장군봉 등이 작은 산맥을 형성한다.

동쪽으로 장흥, 북쪽으로 나주를 바라보며 남쪽과 서쪽으로 강진, 해남, 목포, 이 고을들을 둘러싼 다도해를 내려다본다.

골짝 골짝에 도갑사, 무위사, 경포대 등 명찰과 명승이 자리 잡고 있다.

◇ 영암의 큰 바위 얼굴

장군바위, 돼지바위, 남근바위, 베틀굴 등은 구정봉에서 천황봉으로 가는 도중에 만날 수 있는 괴석들이다.

장군바위는 구정봉의 사면을 이룬다. 기암절벽인 이 바위는 멀리서 보면 사람 얼굴처럼 보인다.

해가 바위 뒤로 넘어가면 눈 밑과 코 밑에 그늘이 져 얼굴의 형체는 더 뚜렷하게 드러난다.

당당하고 근엄한 분위기 때문에 장군이라는 이름을 얻었지만, 요즘은 '큰 바위 얼굴'이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사진 명소로 사랑받는다.

미국 소설가 나다니엘 호손의 단편 '큰 바위 얼굴'은 진실하고 겸손하게 살아가는 인물에 관한 이야기이다.

암벽의 지세가 강건한 영암은 오래전부터 기가 센 고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그 정기를 이어받아 큰 인물이 적지 않게 배출됐다.

백제의 문물을 일본에 전파해 아스카 문화를 꽃피우게 했던 왕인박사, 풍수지리설의 시조이자 신라 4대 고승으로 고려의 건국을 예언했던 도선 국사, 고려 개국 시기에 여섯 국왕을 보좌하면서 왕조의 기틀을 안정시켰던 최지몽은 영암이 낳은 대표적 큰 바위 얼굴들이다.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4년 10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ksh@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