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 수필 공간] 서미숙 수필가 '손'

데일리한국 2024-09-30 08:03:33
서미숙 수필가 연재 섬네일. 사진=데일리한국 DB 서미숙 수필가 연재 섬네일. 사진=데일리한국 DB

"사람은 말여, 뭣보다도 손이 곧 그 사람이여. 사람을 지대루 알려믄 손을 봐야 혀, 손을 보믄 그이가 어트게 살아온 사람인지, 살림이 편안한지 곤란헌지. 마음이 좋은지 안 좋은지꺼정 다 알 수 있당게. 얼굴은 그짓말을 혀도 손은 그짓말을 못 하는 겨" (손이 들려준 이야기들/최승훈 그림·김혜원 글)

김혜원의 글을 읽는 중에 문득 예식장에서 오래간만에 만난 초등 동창이 악수하면서 건넨 말이 떠올랐다. "에계계, 손이 이게 뭐로. 아~들(아이들) 손 같네"그는 내게서 어떤 손을 기대했을까. 아이들 손 같다는 그의 말이 듣기에 반갑지만은 않았다. 

"손이 참 곱네요. 밥도 안 해 먹나 봐요" 칭찬으로 하는 말인가 싶으면서도 언젠가부터 이러한 말이 오히려 부담스러웠다. 주부로서 직분을 저버리거나 몸을 너무 사려왔다는 반증 같아서이다. 

예전에 겪은 일이다. 한동안 내왕이 없던 문우를 만난 자리였다. 반가운 마음에 악수를 청했더니, 그는 뜻밖에도 머뭇거렸다. 손이 너무 거칠다면서. 마지못해 내미는 그의 손은 생채기와 옹이가 박혀서 사포처럼 까슬한가 하면, 길쌈하는 마당에서 삼베 매는 다보록한 풀솔을 쓰다듬는 듯 거칠었다. 순간 그에 대한 존경심이 마구 증폭했다. 일하는 손이 위대하다고, 오히려 자랑스러운 손이라고 그의 손을 불끈 잡아주었다.

그날 그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부부가 퇴직 후 전원에서 편안한 노후를 보내는 줄 알았다. 실은 사업 실패로 곤궁한 터널에서 벗어나지 못한 처지였다. 완전 빈손으로 재기를 위해 산골에서 과수 농사를 시작했으니, 심신이 피폐해졌으리라. 다행히 천생연분인 아내와 손잡고 그 흔한 장갑조차 끼지 않고 고행하듯이 일해온 까닭에 이제는 마음 비우고 살만해졌다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올해 운수에 삼재가 들었다더니, 내게도 액운이 닥친 걸까. 최근에 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다. 여행지에서 귀신에 홀린 듯 허공을 밟아 왼쪽 상완골과 손목이 골절되었다. 수술 후 시간이 지나면서 휠체어에서 벗어났지만, 한동안 남편 손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초기엔 퉁퉁 부어오르고 거무죽죽한 것이 짐승의 손을 방불케 했다. 산책하러 갈 때도, 머리 감고 말릴 때도, 심지어 기다란 갓김치를 자를 때조차 그의 손을 빌려야 했다. 그는 다인실 딱딱한 보호자 의자에서 새우잠 자며 묵묵히 나의 왼손이 되어주었다.

환자복 위에 카디건을 망토처럼 걸치고 산책을 나선다. 오랜만에 잡은 남편의 두툼한 손이 낯설다. 손등엔 어느새 노인 반점이 하나둘 생겼지만 따스하다. 시내버스 승강장 의자에 쉬어가면서도 동행해 주는 그가 있어 듬직하다. 산들바람 부는 강변 벤치에 앉아 모처럼 여유를 부린다. 

병동에서 움직이지 못하는 환자들을 보면 그나마 감사하다. 내 발로 걸을 수 있고, 오른손을 쓸 수 있어서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는지 야속하다. 나도 모르게 목에 힘이 들어간 걸까. 고개 숙여 아래를 두루 살피란 준엄한 경고일까.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처럼 달려왔으니 이렇게라도 쉬어가라는 뜻일까. 

이제는 건강한 손이 부럽다. 고운 손이건 거친 손이건 괘념치 않는다. 산책길에 양팔 자유롭게 흔들며 조깅하는 청춘에게서 눈을 뗄 수 없다. 오늘도 굳은 어깨 근육을 풀어주고, 경직돼버린 팔과 손가락을 펴기 위해 어금니를 문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 서미숙 주요 약력

△경북 안동 출생 △계간 '문장'(2015) 등단 △수필집 '남의 눈에 꽃이 되게' 기행수필집 '종점 기행' △제20회 원종린수필문학상(작품상) 수상 △한국문인협회, 한국수필가협회, 한국여행작가협회 회원 △프리랜서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