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의 수필가 11인-] 정진희 '키다리 아저씨'

데일리한국 2024-09-29 16:52:17
사진=최기환 사진작가 제공 사진=최기환 사진작가 제공

시누이가 허리 수술을 한 병원에 문병을 다닐 때였다. 옆 침대에 젊은 아가씨가 교통사고로 입원해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멀쩡해 보이는데 목과 척추가 아프다고 했다. 차 수리비나 접촉 사고의 정도로 보면 큰 사고가 아닌데 이 기회를 빌미로 목돈을 챙기려는 것 같았다. 직장도 없다면서 노랗게 물들인 머리에서 담배냄새가 풀풀 나는 것이 어딘지 불량기가 있어 보였다. 그래도 한창 나이에 누워있는 것이 안쓰러워 이것저것을 챙겨 주었더니 스스럼없이 자기 얘기를 술술 풀어놓았다. 

그녀는 스무 살에 남자한테 빠져 결혼식을 올렸는데 결혼식날 친정 엄마가 축의금함을 들고 도망갔단다. 그 엄마가 지금은 치매로 요양병원에 있다며 무남독녀라 자기밖엔 거둘 사람이 없다고 했다. 그런 사정을 듣고 보니 나는 그녀가 기특하고 가여워졌다. 불량스러워 보였던 인상은 자취를 감추고 나는 그녀가 이 기회에 목돈을 쥐고 나가길 바라는 마음까지 들었다.

며칠 후 병문안을 갔을 때 그녀를 찾아온 남자가 있었다. 마치 먼 나라에서 온 난민처럼 새까만 얼굴과 바짝 마른 체형의 그는 그녀의 외삼촌이었다. "천만다행이야. 이참에 푹 쉬고 뭐든 먹고 싶은 거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삼촌이 다 사다줄게. 삼촌이 있잖아, 걱정말고" 이미 과일과 음료수를 잔뜩 사온 그는 연신 다정한 말투로 아프진 않냐, 불편한 건 없느냐, 필요한 건 다 말하라며 조카를 보살피다 돌아갔다. 

그녀는 철없던 시절에 결혼한 남자와 이혼 후 자기를 딸처럼 여기는 외삼촌 집에 깃들어 산다고 했다. 부모덕은 없지만 삼촌이 그 자릴 대신해 준다고 생각하니 푸근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그가 연신 삼촌이 있잖아, 걱정말라는 말에 울컥 설움이 복받쳤다. 내게도 저리 친절하게 뭐든 들어주겠다는 사람이 있었던가?

존 웹스터가 쓴 소설 '키다리 아저씨'는 고아원 소녀 제루샤 애벗(애칭-주디)이 '키다리 아저씨'라고 부르는 익명의 후원자에게 보내는 편지글이다. 후원자인 존 스미스는 주디의 글솜씨를 인정해 그녀가 그토록 원하는 대학진학을 후원한다. 그는 주디의 문학적 표현을 위해 한 달에 한 번씩 편지 쓸 것을 요구하는데 그 속에는 삶을 긍정하고 꿈을 향해 전진하는 한 소녀가 성숙한 여인으로 성장하기까지의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병실에서 만난, 초라하지만 따뜻한 남자의 모습에서 키다리 아저씨를 떠올린 나는 내 안에 자라지 않은 소녀를 보았다. 아버지를 일찍 여윈 나는 늘 아버지 같은 남자를 동경해왔다. 아무런 조건도 이유도 없이 내 편이 되어 줄 키다리 아저씨를 기다린 것이다. 이제는 주어진 삶을 전적으로 받아들이고 그런 사람은 없어도 될 정도로 강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 새까만 얼굴의 남자가 내게 키다리아저씨에 대한 환상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서러운 생각이 들면서 마음 한 귀퉁이로 쓸쓸한 바람이 지나갔다. 그런데 그 바람소리에 무언가 다른 소리가 섞여 있었다. "너에게도 무수한 키다리 아저씨들이 있었단다. 이제는 네가 다른 사람에게 키다리 아저씨가 되어 줄 때가 오지 않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돌이켜보니 중학교 전 학년 장학금을 주신 선생님, 내게 아버지처럼 편지를 보내 주시고 글을 쓰라고 하셨던 선생님, 엄마처럼 필요한 것을 몰래 선물로 주신 선생님들이 모두 키다리 아저씨였다. 그런가 하면 어른이 되어서도 삶의 길목마다 나의 손을 잡아 준 키다리 아저씨들이 있었다. 마음을 다쳐 실의에 빠진 내게 '본래면목'을 깨우쳐 주신 선생님, 글쓰기를 포기하지 않게 끊임없이 독려해주신 선생님, 내 역량보다 큰 기대로 나를 일어서게 한 선생님 등, 모두 내게 키다리 아저씨라는 지팡이이고 사다리였다.

가장 최근에 만난 키다리 아저씨도 있다. 그분은 내가 한 수필가 단체 회장직을 맡아 구입한 부동산에 문제가 생겼을 때 만났다. 협회 사무실로 쓸 오피스텔을 샀는데 임차인이 사기꾼이었다. 마음의 법, 하늘의 법이 우선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사기꾼 법도 우선한다는 현실에 절망하고 있던 차였다. 그런 상황에서 변호사에게 거금을 주고 풀어야 할 문제를 그분은 돈 한 푼 받지 않고, 오히려 정기구독과 광고를 후원해 주며 해결해주었다. 감사의 뜻으로 작은 성의라도 표하고 싶었지만 그 분은 극구 거절하며 자기한테서 받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돌려주면 된다고 말했다. 

기대치 않은 뜻밖의 친절에  뜨거운 감동이 일면서 그 분의 마음과 키가 하늘만큼 커보였다. 사랑과 베풂이 돌고 도는 세상이다. 자신이 베푼 것을 돌려받길 기대하지 않고 사랑을 유전시키는 사람들이 있어 이 세상은 살 만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분의 말씀을 떠올리니 다시 마음이 뜨거워진다. 쉼터, 치유센터 같은 사회적 키다리 아저씨와 국가간의 분쟁을 돕는 국제적 키다리 아저씨도 많이 생겨나 힘없고 소외된 계층이 줄어들고 지구가 평화로운 세상이 되길 바라본다.

산다는 것은 우리가 알게 모르게 키다리 아저씨의 도움으로 세상을 살아내고 자기 몫만큼의 키다리 아저씨가 되어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받은 것들을 세어 보니 돌려주어야 할 것들이 넘친다. 두 손을 내밀어 철없이 키다리 아저씨를 기다리던 소녀를 부축해 일으킨다. "이제는 네 차례야. 너도 할 수 있어" 마음속 깊은 곳에서 그의 음성이 들려온다. 

정진희 수필가. 사진=주간한국 제공 정진희 수필가. 사진=주간한국 제공

◆정진희 주요 약력 

△서울 출생 △에세이플러스'(현 한국산문. 2007) 등단 △한국산문 출판국장 △대담집 '외로운 영혼들의 우체국', 수필집 '우즈강가에서 울프를 만나다' '떠나온 곳에 남겨진 것들' △윤오영문학상, 남촌문학상, 조경희수필문학 신인상, 박종화문학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