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에필로그] 이명지 수필가 "천일야화의 셰에라자드처럼"

데일리한국 2024-09-27 23:07:57
연재를 마친 이명지 수필가가 서재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작가 제공 연재를 마친 이명지 수필가가 서재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작가 제공

아라비안나이트, 천일야화의 셰에라자드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1001일을 이야기로 채웠는데 나는 겨우 60회를 쓰고 천일야화를 회자하는 건 지나친 엄살일까?

나는 삶을 문학으로 채워보려는 꿈이 있다. 내 삶은 위대하지도, 반짝거리지도 않는다. 귀감이 되거나 아름답지도 않다. 그러나 한 사람이 최선을 다해 살아온 여정은 얼마나 가치로운가.

1년 3개월 동안 매주 토요일 '나사문'을 연재하며 나는 진심으로 행복했다. 성장하고 있다고도 느꼈다. 내 삶을 쓰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너의 이야기를 쓰고, 인생을 쓰고, 나의 희망을 담아내고 있었다.

아직 떫은 기가 빠지지 않은 내 삶에 단물이 배는 순간이 있다면 그것은 좋은 글감을 만났을 때다. 가슴으로 스미는 문장과 조우했을 때다. 생의 단맛도 잘 익은 와인처럼 떫은맛과 적당히 어우러졌을 때에야 바디감이 묵직한 진짜 맛이 났다. 문장이 삶과 만난 순간이었다.

60편의 연재를 쓰면서 한 권씩 책상에 쌓인 책이 100여 권이 넘었다. 주문한 책이 매일이다시피 대문 앞에 당도하기도 하고 서재 책장에서 빼내기도 했다. 유명 작가의 이름에 기대지 않고 오직 내 마음에 말을 걸어오는 문장을 끌어안고 뒹굴었다. 뜨거웠다. 그렇게 낳은 한 편 한 편은 잘나기도, 혹은 못나기도 했지만, 모두가 나의 자식들이 되었다.

하지만  책만으로는 사랑이 성사되지 않았다. 읽고 쓰는 일이 전업인 작가여도 15개월을 매주 마감 기일에 맞춰 쓰는 일은 녹록지 않은 작업이었다. 40여 회까지는 알맞게 숨이 차는 느낌이 좋았다. 그러나 다른 문예지의 연재와 사이사이 청탁 원고들의 마감이 한꺼번에 몰릴 때는 숨이 턱에 찼다. 그럴 때마다 치열하게 고독한 나와 마주 서려 했고, 고독 속에서 깊어지고 맑아지는 생각과 만나려 안간힘을 썼다.

셰에라자드는 자신의 이야기가 끊어지면 잔혹한 황제에게서 자신의 목숨도, 도시의 슬픔도 구하지 못하는 절체절명의 상황에 있었다. 하지만 그토록 많은 이야기를 퍼 올릴 수 있었던 건 독서라는 기반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또한 이야기를 들어주는 여동생 디나르자드가 있었기에 가능했고, 지켜내야 할 그 무엇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명지 수필가 연재 섬네일. 사진=데일리한국DB 이명지 수필가 연재 섬네일. 사진=데일리한국DB

내게 가장 힘이 되어주었던 건 디나르자드 같은 독자들이다. 내 글을 읽는 재미로 토요일을 기다린다거나, 포스팅 시간이 늦어지면 왜 글이 안 올라오느냐고 애정어린 성화를 부리는 독자, 사방팔방으로 글을 퍼 나른다는 독자, 같이 울고 웃는다는 독자, 매번 깨알같이 리뷰를 보내오는 독자, 일부러 달려와 덥석 손을 잡아주는 문우... 내 이야기에 귀 기울여준 많은 이들의 응원이 내 열정을 지펴주었다.

연재는 항상 생각의 스위치를 켜고 있어야 했기에, 내 주위의 모든 것이 글감이 되고 상황이 말을 걸어왔다. 하여 무엇보다 내 글에 뮤즈가 되기도, 제물이 되기도 한 주변의 인연들과 가족들에게 고맙고 또 미안한 마음이다. 

천일야화를 이어간 셰에라자드는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겨우 예순 번의 이야기를 풀어내고 고갈이 된 나는 지금 낯선 곳에 와있다. 텅 비어버린 곳간을 채우기 위해 흘러와 멍때리기 여러 날째, 이제야 겨우 몇 줄의 문장을 맺는다.

크로아티아 보디체, 아드리아 해변 숙소 테라스에서 먹빛 바다를 눈으로 더듬는다. 어디선가 성당의 저녁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은은하게 불빛이 흘러나오는 주택가, 일과를 끝낸 차들이 정박한 한적한 마을 길 구석구석으로 종소리가 채워진다. 막 가을이 시작된 이곳의 바람은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오래된 연인의 손길 같다.

나는 다시 쓰게 될 것이다. 아니 살아있는 내 삶을 뜨겁게 은유하기 위해 오늘을 살 것이다. 살며 사랑할 것이다. 한 인간이 걸어가는 오롯한 족적은, 토룡의 그것이라 해도 가치롭다. 실존, 지금 여기 살아있음은 그 어떤 본질보다 위대한 것임을 다시 깨닫는다.

내가 지켜야 할 것은 무엇일까? 커다란 화두 하나 가슴에서 덜컹거린다.

고즈넉한 해변 마을 저녁 종소리가 하루를 마친 사람들의 등을 어루만져주고 있다. 지친 이방인 여인의 어깨도 가만가만 토닥인다. 마을이 종소리를 품는다. 

◆ 이명지 주요 약력 

△경북 영천 출생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문창과 졸업 △수필집 '육십, 뜨거워도 괜찮아' '헤이, 하고 네가 나를 부를 때' 등 다수 △제42회 조연현문학상, 제32회 동국문학상, 제6회 창작수필문학상 수상, 제17회 한국산문 문학상 △현재 (사)한국문인협회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