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가가 뽑은 좋은 수필-29] 이방주 '자연에서 찾은 생(生)의 시원(始原)'

데일리한국 2024-09-23 22:11:29
이방주 문학평론가 섬네일. 사진=데일리한국DB 이방주 문학평론가 섬네일. 사진=데일리한국DB

김정태 수필가의 '감꽃 핀 자리'를 읽고 한동안 가슴이 먹먹했다. 절절한 서사가 울렸고, '감꽃'이라는 상관물의 본질을 통찰하여 자아의 실존적인 문제를 담담하게 고백하는 구조화된 수필 쓰기에 감탄했고, 대상을 묘사하여 자신의 심상을 독자에게 재생시키는 수필적 언어와 형상화 기법에 놀랐다. 

문학적 치유의 효과는 진정성 있는 성찰과 고백에 있다. 실체적 진실에 바탕을 둔 진정성 있는 언어가 울림이 큰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작가는 창작과정에서, 독자는 수용과정에서 변환과 성장을 가져오게 마련이다. 

김정태의 '감꽃 핀 자리'는 일단 서사가 감동적이다. 환갑을 넘은 작가 자신이 노환중인 구순 어머니를 지극한 마음으로 부양한다. 어머니를 모시면서 자신의 어린 시절 기억을 반추한다. 거기에 감꽃에 대한 기억과 어머니의 기억이 함께 한다. 자식 같은 '인민군에게 밥을 준' 어머니, '내 새끼 똥은 감꽃'이라며 손으로 똥을 치운 이야기를 하던 어머니를 기억하며 지금은 작가 자신이 어머니의 똥을 치운다. 

또한 감꽃이라는 상관물에 비추어 자아의 존재 의미를 천착하는 사유의 세계가 돋보인다. 감꽃의 생애는 그 존재의 근원이 '아득함'이다가 '초경을 앞 둔 딸아이의 요동치는 마음'처럼 짐작하기 어렵다가 '무리'인 듯 '개별적'이다가 결국 생의 끝에서 무더기가 되어 '합장(合葬)의식'으로 까맣게 변해간다. 

여기서 감꽃의 생애에 대한 통찰은 결국 어머니의 생애 돌아보기를 전제로 한다. 감꽃의 생애는 어머니의 생애를 철학적으로 반영하는 청동경(靑銅鏡)이다. 감꽃이 개별적으로 떨어져 무더기로 말라가듯 어머니의 생애도 감꽃처럼 까맣게 말라간다. 실타래처럼 엉켜서 되감을 수 없는 어머니 기억의 저편에서 감꽃은 피었다 떨어져 말라가는 것이다. 감꽃과 어머니 생애는 결국 하나이다. 

감꽃과 어머니 생애가 자연의 섭리라는 하나의 원리로 합일된 것이다. 자연의 일이나 사람의 일이나 떨어지면 마르고 나이 들면 흐려지고 말라가는 것으로 보편화한다. 합일의 울림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낮아진 어머니의 젖무덤에서 '떨구지 못한 감꽃'을 발견한다. 그리고 거기서 자아의 실체적 본질을 발견한다. '감꽃 핀 자리, 거기가 내 생의 시원(始原)인데'라고 독백처럼 내뱉은 마지막 일갈(一喝)이 '감꽃, 어머니, 나'가 우주의 섭리에 의해 하나로 모아졌음을 꾸짖어 깨우친다. 어머니 젖꼭지는 지금은 감꽃처럼 까맣게 말라가지만 지난날 우리네 생의 근원이고 자연과 우주의 시작점이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작품은 일상적이고 개별적인 소재를 감각적이고 섬세한 묘사로 기억을 재생시켜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아울러 수필은 진정성 있는 고백으로 개별적 경험을 보편화하여 철학적 변환과 성장을 가져오는 문학 양식임을 확신할 수 있도록 한 작품이다.   

◆ 이방주  주요 약력

△충북 청주 출생 △(1998) 수필 (2014) 평론 등단 △현재 서원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강사 △한국수필가협회 부이사장 △수필집 '들꽃 들풀에 길을 묻다' 외 6권 △수필선집 '덩굴꽃이 자유를 주네' △평론집 '해석과 상상', 수필창작이론서 '느림보의 수필 창작 강의' △한국수필문학상, 신곡문학상 대상 수상

♣글/김정태 '감꽃 핀 자리'

저절로 서있는 마당 한편 감나무에 올해도 감꽃이 피었다. 덩달아 서 있는 듯 무심한 목련은 꽃잎을 떨군 지 오래다. 제 몸의 무게만으로 목련의 꽃잎은 수직으로 떨어진다. 바람에 날려 사선을 그으며 춤을 추듯 생을 마감하는 다른 꽃잎을 되레 나무라는 것일까. 그냥 있다가 문득 뚝 떨어진다. 떨어진 꽃잎은 바닥에 발을 굳게 디디고 가는 바람에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목련꽃잎이 바람에 떠밀리는 때는, 이미 제 모습을 잃고 누렇게 변색 되어 삶의 무게를 덜어냈을 때다. 덜어내 가볍긴 하되 색은 꺼무튀튀하다. 그때쯤 나무는 연둣빛 물감을 제 몸에서 풀어낸다.

나란히 서서 같은 양의 볕을 받고 바람도 쐬지만 감꽃의 생애는 목련과는 사뭇 다르다. 감꽃이 한창 필 때, 꽃은 나무에 가득하고 떨어진 꽃은 바닥에 무더기로 눕는 것인데, 누운 감꽃에는 아득함이 배어 있다. 그 아득함이 감꽃 어디에서 오는지 알지 못하니 난 감꽃의 아득함에 대해서 말하지 못한다.

봄볕을 다 쬐고 초여름 볕이 내리기 시작할 때, 감꽃은 초록 이파리 사이에 숨어 핀다. 얼굴을 쉽게 내밀지 않아, 초경을 앞둔 딸아이의 요동치는 마음을 겉으로만 보고 변화를 모르듯 언뜻 알아채기 쉽지 않다. 볕을 받던 감꽃은 무리 같으면서도 개별적이어서 각각 시나브로 떨어지기 시작한다. 꽃잎을 분산시키지 않고 통으로 떨어진다. 떨어진 꽃은 포개져 무더기를 이룬다. 

감꽃은 땅위에 내려앉았지만 목련의 그것처럼 땅에 발을 디디지 않고 다만 땅 위에 얹힌다. 얹힌 감꽃을 바람이 데리고 간다. 꽃 진 자리에 아기 손톱만한 열매가 달린다. 열매를 두고 내려앉은 감꽃은 까맣게 변색되어 간다. 피어난 감꽃은 생을 마감하고 개별적으로 뒹굴지 않고 바람이 부는 대로 구르다가 낮은 곳에 포개져 마치 한 덩어리처럼 모여 있다. 그것은 생의 끝을 합장(合葬) 의식으로 치르는 듯하다. 땅에 얹혀서 그 신산한 제 몸통을 통째로 볕에 말린다. 까맣게 변한 감꽃의 생애다.

'환갑이나 넘기겠느냐' 하시던 어머니는 구순을 넘기고 이태를 더 살아내고 계신다. 늘 방안에 누워 미동도 없다. 살 겉이 물러 약을 발라 드리면 볕에 꽃잎 말라가듯 꾸덕꾸덕 해진다. 그 과정은 늘 심란한 것이어서 바람이라도 쐬라고 창문을 열면 이불 속으로 몸을 숨긴다. 바람과 볕에 까매지는 것을 아시는 건지. 그렇게 마르며 까매져 끝에 닿는다는 것을. 물어볼 일도 아니지만 물어도 대답을 아니 하실 것이다. 

뒷일을 보는 것조차 힘들고 때론 잊기도 한다. 기억은 풀어진 실타래처럼 엉켜 추슬러 되감기엔 시간이 넘어서 앞질러 가고 있다. 그 시간을 부릴 수 없으니 나는 도리가 없다. 어쩌면 풀어 헤쳐진 실은 어느 지점에서 끊어진 게 분명하다. 이제 실타래에 남아 있는 실은 잘 사려 감는다고 해도 몇 올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그 한 움큼도 되지 않을 풀어진 실타래 같은 기억의 저편에 감꽃이 피고 지고 말라가고 있다.

어릴 적 앞집에 고목이 된 감나무 두 그루가 있었다. 그 해, 시집을 온 열여덟 새색시 내 어머니가, 배가 고파 나무아래 누워있는 소년 인민군을 부엌으로 데려와 밥을 먹였다던 아득한 추억의 감나무이다. 그때, 마지막 감꽃이 지고 있었다고 기억이 있던 어머니는 말했었다. 사실과 전설은 이제 구분되어지지도 구분할 이유도 없다.

어린 시절의 봄날, 아침잠에서 깨면 앞집 감나무 아래로 뛰어가곤 했다. 노란 감꽃이 바닥을 온통 물들이고 있었다. 실로 꿰어 감꽃 목걸이를 만들거나, 더러는 주우며 먹기도 했다. 꽃 속에 숨어 있던 개미가 놀라 기어 나오면 개미보다 더 놀라 입안의 꽃을 뱉었다. 달착지근한 맛이 아까시아꽃 보다 맛이 순했다. 

잠에서 깨 마당에 서서 눈가 졸음을 지우려고 할 때, 어머니는 "앞집 감나무 아래 가보렴. 누나 거기 갔다" 하시곤 했다. 누나와 함께 주은 감꽃 그득 담긴 바구니를 어머니에게 보여드릴 때, 무슨 장한 일이라도 해낸 것처럼 뿌듯했다. "막내 바구니가 누이보다 그득하네" 어머니가 하시던 그 말이 그때는 왜 그리 좋았던지. 미동도 않던 어머니 방에서 기척이 났다. 같은 자세로 오래 누워 있다가 몸이 불편할 때 짧게 내는 나름의 구조 요청 신호라는 것을 안다. 방안은 냄새가 가득했다. 이불을 들추고 돌아 뉘였다. 기저귀 밖으로 뒷일 본 것이 노랗게 새어나와 있었다. 

대학시절인지, 졸업 후 결혼하기 전인지 어머니와 내 어릴 적 이야기를 두런두런 나눈 일이 있었다. 서향이던 마루에 앉아 앞산에서 내려오는 저녁노을을 등으로 받으며 칼국수 반죽을 밀고 계셨던가. 어쩌다 똥 싼 일이 화젯거리가 됐는지는 기억에 없다. 다만 우리 남매들 똥 이야기를 유쾌하게 하시던 어머니와 얼굴을 찡그리며 얘기를 나누던 일이, 저녁 하늘을 힘껏 물들이고 산으로 가라앉는 순간의 해처럼 또렷하다.  

"엄니, 자식 똥이라도 여하튼 똥은 더럽잖수. 그래, 삼남매 똥을 다 치우며 농사일을 어찌 하셨소? 집안 일거리가 적은 것도 아니고" 어머니는 그때 그러셨다. 들에 갔다 오면 기저귀는 기저귀대로 나뒹굴고 똥 범벅을 한 애는 애대로 울고 있었다고. 이불 위에 똥을 싼 것을 보면, 감꽃이 떨어져 마르기전에 움푹한 곳에 쌓여있는 것 같았다고. 내 새끼 똥을 맨손으로 치웠다고. 그러기는 하거니와, 지금, 어머니의 뒷일 본 것이 내게 감꽃으로 보일 리 만무다. 

"엄니 날 부르면 되잖소?  왜 더럽게..." 아, 이 말은 입 밖에 낼 소리가 아닌데... 이미 늦었다. 벌어지는 일만으로도 기막힌 일인데, 더 기막히게도 쓸 데 없는 말까지 부조하고 나선 꼴이 됐다. 아니꼬운 자식의 자리에서 들이댈 만한 말이 아니란 것쯤이야 진즉 알고도 남는데, 무릅쓰고 가야할 길에서 번번이 쑤셔 박힌다. 어머니의 뒷일 본 것을 기저귀에 욱여싸서 방문을 나서는데 눈앞이 뿌예져 벽에 똥 묻은 기저귀를 뭉갤 뻔했다.

감꽃이 무더기로 말라가든 낱개로 흩어져 개별성을 유지하든, 떨어진 감꽃의 끝은 말라간다는 것일 터인데, 사람의 일을 앞에 놓고 보편성이라는 단어로 밀어붙이면 내 어머니의 지금 삶은 그저 그런 일이 되고 마는 것인가. 떨어지면 마르는 것이고, 나이 들면 흐려지고 가벼워지는 보편적 상황에서 내 어머니의 삶도 뭉뚱그려 그 범주에 넣으면 불민한 자식은 맘이 편해질까. 이런 모든 것들을 누군가에게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싶으나 될 말이 아니기에 묻지 않는다. 

물을 데워 몸을 씻기고 뽀송한 요대기를 골라 앉혀드렸다. 모자간에 서로 손길이 가지 않은 곳은 없다. 당신이 내게 했듯, 몸을 씻겼다. 갈아 입혀드린 윗옷 헐렁한 목 사이로 어머니의 낮아진 젖무덤이 안쓰럽게 붙어 있다. 가슴 양쪽으로 감꽃 진 자리에 떨구지 못한 감꽃이 까맣게 매달려 있다. 감꽃 핀 자리, 거기가 내 생의 시원(始原)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