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 수필 공간] 이용옥 수필가 '그 여자의 곰스크'

데일리한국 2024-09-23 00:38:22
이용옥 수필가 연재 섬네일. 사진=데일리한국DB 이용옥 수필가 연재 섬네일. 사진=데일리한국DB

"싸와디 캅!" 우리의 인사에 주인남자가 반색을 한다. 소리로 하는 말이 아니라 전신으로 하는 몸의 언어다. 잠시 후, 주인여자가 주문한 음식을 내온다. 꾸에이띠오무뜬, 돼지고기가 얹힌 태국쌀국수다. 

"우박이 자주 오나 봐요" 느닷없는 우박에 온 동네가 비설거지를 하느라 야단이다. 기온이 40도에 육박하는데 우박이라니. 다행히 포장마차식 음식점인 이집에는 별 지장이 없다. 내 말에 여자가 태국어로 뭐라 중얼거리더니 배시시 웃는다. 무슨 뜻인지 모르는 나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통하지 않는 언어지만 소통이 되는 느낌이 신기하다.

싼티탐, 우리는 며칠 째 여기 머물고 있다. 아침운동 후 점심을 사 먹고 관광지에 들렀다가 귀가해서 제집처럼 저녁을 해결하는 곳이 여기다. 나는 이 집이 마음에 든다. 유쾌한 주인남자와 다정한 그의 아내, 부부는 이곳에서 우리가 사귄 가장 가까운 이웃이다.

남편은 퇴직만 하면 이 도시로 오겠다고 노래를 불렀다. 곰스크를 향한 길이니 말리지 말라는 말과 함께. 틀에 박힌 듯한 그의 삶에도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열망이 남아 있다는 것이 신기했고, 아이들 어릴 때 뛰쳐나가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 여겼다. 그래서 두말없이 따라 나섰다.

언어도 문화도 낯선 생활이 쉽지만은 않았다. 돈을 찾으려다 ATM기가 카드를 삼켜 찾는데 나흘이나 걸렸다. 오지 카페를 향해 나선 외길에서 세 번이나 받았던 검문, 나중에야 그곳이 마약밀매가 잦은 미얀마와의 국경지대란 사실을 알았다. 임대한 소형차로 내리막길을 달리다 브레이크 파열 직전까지 갔고, 오지마을 외길에서 마주 오는 차를 피하다 낭떠러지로 구를 뻔한 일은 지금 생각해도 오싹하다.

그들의 가게에 손님이 뜸한 어느 날, 남편과 주인 남자가 번역기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남자는 대뜸 '경기도 포천'을 아느냐고 했다. 친구 둘이 포천의 플라스틱 공장으로 돈을 벌러 갔는데 자기는 아이가 생겨 가지 못했다고. 남자의 어깨 너머로는 서너 살 난 그의 딸이 털이 흰 고양이와 놀고 있었고 어린 아내는 사랑스럽게 딸을 바라보고 있었다. 동경으로 가득 찬 남자의 눈동자, 아이만 크면 꼭 포천으로 가겠다는 그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곰스크로 가는 기차를 놓친 사내가 여기에도 있었군.’이라고. 

오후 네 시 반이면 어김없이 포장마차를 펼쳐 쌀국수를 삶고 팟타이를 볶는 남자, 그의 곁에서 재빠른 솜씨로 비닐봉지에 육수를 담아 고무줄을 묶는 아내, 엄마 품을 뺏기고도 고양이를 쫓아다니며 해해대는 그의 딸. 그들을 보며 나는 남편에게 묻는다. "여기서 한 달만 더 살까?" 무슨 가당찮은 말이냐는 듯이 덤덤히 날 보는 남편. 그의 마음은 벌써 떠나온 곳을 향하고 있다. 

먼 훗날, 주인남자도 알게 될까. 떠난다는 것은 단지 두고 온 곳의 소중함을 확인하기 위한 과정이라는 것을. 지금 그가 서있는 자리가 가장 확실한 곰스크란 사실을. 두 남자를 바라보다 나는 문득 생각한다. 내 곰스크는 어디에 있을까. 한 번도 꿈꿔 본 적 없는 그곳. 어쩌면 나는 이미 그곳을 거쳐 왔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한다. 그리움을 두고 온 곳 모두가 내 곰스크가 아니었을지...

◆ 이용옥 주요 프로필

△계간수필 등단(2013), 한국수필 평론 등단(2022) △수필집 '석모도 바람길' △수필미학 문학상, 율목문학상, 공무원문예대전 희곡, 동화 부문 수상 △계수회, 수필문우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