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마지막회(60)] 이혜선 시 '흘린 술이 반이다'

데일리한국 2024-09-20 23:41:45
이명지 수필가 연재 섬네일. 사진=데일리한국DB 이명지 수필가 연재 섬네일. 사진=데일리한국DB

"새끼 제비 날아간 저녁밥상, 마주 앉은 희끗한 머리칼 서로 측은히 건네다본다

흘린 술이 반이기 때문일까 함께 마셔야 할 술이 아직도 반쯤 남았다고 믿고 싶은 눈짓일까 속을 알 수 없는 생명의 술병 속에"

-이혜선, 문예바다 서정시선집 019 /문예바다 刊

나의 술병 속에는 술이 얼마나 남았을까? 속을 알 수 없는 나의 술병 속에는... 연재를 마치려니 아직도 못다 한 얘기, 쓰고 싶은 얘기가 너무나 많다. 아니, 흘린 문장이 반도 넘는다. 나를 홀리고 사로잡으며 말을 건넨 문장에 포스트잇을 붙인 책이 책상에 쌓여있고, 따로 적어놓은 노트가 두 권, 휴대폰 메모장에도 셀 수 없이 그득하다. 

아직 추수하지 못한 글감 낟가리를 풍성하게 쌓아놓은 기분은 어느 부자도 부럽지 않게 한다. '나사문'이 아니었다면 이토록 열심히 읽었을까? 이토록 열심히 알곡을 모았을까? 덕분이다. 휴가를 몽땅 쓰면서도, 잠과 휴식을 줄이면서도, 해외 일정의 비행기 안에서도, 호텔 방에서도, 심지어 투어버스 안에서도 읽고 또 썼다. 

평생 이토록 치열하게 책을 읽고, 문장에 말 걸기를 시도해본 적이 있었던가? 평생 어떤 연인과 이토록 뜨거워 본 적이 있었던가? 어떤 연인이 이토록 치열하게 내 가슴 밑바닥의 것을 퍼 올리고, 때로 냉철한 죽비로 등을 후려치며 함께 울어주었던가? 따뜻하게 끌어안으며 내 삶을 토닥여 주었던가? 

나는 마치 60명의 연인과 연애를 한 기분이다. 그의 발에 기꺼운 입맞춤을 한 느낌이다. 그럼에도 놓친 게 더 많고, 아쉬운 게 더 많고 흘린 술이 반도 넘는 것 같다. 인생이 이와 같을까...

"그 인사동 포장마차 술자리의 화두는 '흘린 술이 반이다' "

이혜선 시인이 인사동 술자리에서 들고 온 화두가 털썩 내 옆에 자리를 잡는다. 내가 흘린 것이 어찌 술뿐일까? 놓친 문장의 알곡들은 창고에 쌓아 두었는데, 정작 내가 놓치고 온 것은 잡히지 않는 것들이 더 많다. 

엄마 지갑에서 몰래 지폐를 빼내 온 일, 사촌 언니 첫사랑 비밀 일기장을 훔쳐보고 발설한 일은 아직 사과하지 못했다. 명절이면 막내 외삼촌이 최신 유행 학용품을 한 아름씩 사다 주었음에도 나는 여태 과일 한 상자 보내드리지 못하고 살았음을 깨닫는다. 

중학생이 되었다고 둘째 오빠가 맞춰준 까만 가죽 구두, 자물쇠가 달린 일기장 선물도 고맙단 인사를 제대로 못 했구나. 귀하고 맛있는 건 막내 몫이라며 손도 안 대던 겨우 두 살 위 막내 오빠, 통학 버스를 기다리며 동전으로 홀짝 게임을 하다 내가 잃은 건 다 돌려받고, 딴 건 몽땅 챙기는 욕심쟁이 동생에게 늘 져주던 막내 오빠에게도 나는 아직 미안하단 말을 못 했구나.      

말에도 때가 있다. 아름다움에도 크기가 있는 것처럼 말도 효용의 크기가 있다. 제때 하지 못한 고맙다는 말, 사랑한다는 말, 미안하다는 말들... 때를 놓친 말들은 쪼그라들고 빛바래 영원히 기회를 놓치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돌아보니 흘려버린 언어들이 불현듯 자갈돌이 되어 가슴에서 달가닥거린다. 

제때 한 따뜻한 말은 어느 순간 내게로 돌아와 괜찮다 괜찮다며 등을 토닥인다. 속을 알 수 없는 나의 술병에 남은 술이 얼마일지 모르지만, 마지막 한 방울이 다할 때까지 사랑하는 사람들과 행복하고 싶다. 그들의 술잔에 한 방울 내 향기 보탤 수 있다면 무얼 더 바랄까.

◆ 이명지 주요 약력 

△경북 영천 출생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문창과 졸업 △수필집 '육십, 뜨거워도 괜찮아' '헤이, 하고 네가 나를 부를 때' 등 다수 △제42회 조연현문학상, 제32회 동국문학상, 제6회 창작수필문학상 수상, 제17회 한국산문 문학상 △현재 (사)한국문인협회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