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49] 나이 들면 왜 색(色)이 좋을까?

데일리한국 2024-07-06 09:22:09
이명지 수필가 연재 섬네일. 사진=데일리한국DB 이명지 수필가 연재 섬네일. 사진=데일리한국DB

"과일이나 사람이나 물 빠지면 니맛내맛도 없다!"

-우리 모친 어록 中에서

비가 개자 화단 꽃들 색이 희멀겋다. 키 작은 빨간 백일홍은 소갈머리가 허옇게 바랬고, 장미도 낯빛이 묽다. 꽃도 빗물에 색이 묽어지나 보다. 며칠째 비에 시달린 꽃들이 고개를 떨어트린 채 풀 죽어 있다. 사랑도 넘치면 폭력이 되나 보다. 

비 온 뒤 바로 딴 과일은 싱겁다. 단물이 비에 씻겨 맹숭해진다. 그래서 과일을 수확할 때는 반드시 비 그친 뒤 하루 이틀 바짝 볕에 맛을 들이고 나서야 딴다. 그래서 과수원집 아이들은 비 온 뒤 과일에는 손도 안 댄다. 나는 지금도 그 습관이 있어 장마철에는 노지 과일을 잘 사지 않는다. 과수원집 안주인이었던 우리 엄마는 비 온 뒤 과일 맛을 '니맛도 내맛도 없다'고 했다. 과일이나 사람이나 물 빠지면 똑같다고 했다. '니맛'은 뭐고 '내맛'은 또 어떤 맛일까? 

나이가 드니 좋아하는 색깔 취향도 바뀐다. 예전에 유치하다고 여겼던 강렬한 색들에 자꾸 눈이 간다. 옷장에 꽃분홍과 보라색이 늘고 손가방과 구두에도 원색이 섞여간다. 예전엔 알록달록해지는 엄마 옷이 못마땅했는데, 언젠가부터는 언니들 옷이 그렇더니 지금은 내 옷장이 똑 닮아가고 있다. 나이가 들면 왜 원색이 좋아질까? 비 맞은 과일처럼 니맛내맛도 없어져서 안간힘을 쓰는 걸까?

언젠가 문우들과 이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어떤 이는 시력이 약해지니 더 또렷하게 보이는 원색이 좋아진다고 했고, 어떤 친구는 나이가 들면 물이 빠져서, 부족한 색을 채워 생기를 얻으려는 본능일 거라 했다. 물이 빠졌다는 것은 색이 바랬다는 뜻이기도 하다. 옷감을 여러 번 빨아서 색이 바래면 물이 빠졌다고 한다. 이 말에 묘한 설득력이 있었다. 그건 색깔도 바래고 수분도 부족하다는 중의적 해석이기도 하니 늙었다는 말의 다름 아니다.

나도 물이 많이 빠졌나 보다. 전원으로 이사해 집수리를 하면서 2층 서재 바깥을 핑크가 섞인 짙은 보라색으로 칠했다. 누가 유치하다 흉볼까 봐 혼자 '퍼플 하우스'라 이름 지어 은밀히 품고는 마치 애인 하나 숨긴 듯 얼마나 설레는가. 

인간이 색깔을 선호하는 데는 개인적 경험, 그것도 좋은 기억으로 남은 것이 작동한다. 내가 퍼플이나 핑크가 좋을 때는 엄마가 그리울 때다. 내 그리움의 근원은 엄마의 참꽃 빛 한복이다. 엄마는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이 옷을 꺼내입곤 했다. 평소 무채색만 입던 엄마가 유일하게 가진 색깔 옷이었는데, 나는 엄마가 이 옷을 입었을 때 제일 예뻤고, 이 옷을 입고 내 손을 잡고 걸었을 때가 가장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색(色)이란 다른 면에서 섹슈얼리티를 연상한다. 정염에 불타는 여인을 색스럽다고 한다. 나이가 들면 빠지는 것이 컬러만이 아니다. 생기와 활력, 정염도 줄어든다. 생명을 향한 본능, 그것이 색이다. 그 색이 빠지면 니맛도 내맛도 없어지는 걸까? 

하지만 색이 빠졌다고 다 안 좋은 것은 아니다. "늙으니 좋다. 두고 갈 것만 남아서 좋다"고 한 박경리 선생의 말씀이 아니라도 적당히 물이 빠지고 편안해진 지금이 나도 좋다. 

벌 나비가 윙윙대던 시절을 지나 외진 골짜기에 홀로 핀 나리꽃이라도 한갓진 지금이 좋다. 단맛 쓴맛 다 우려낸 말간 가슴으로 평상에 앉아 간혹 들려오는 풍경소리 들으며 사는 지금의 '내맛'이 그 어떤 '니맛'에도 부럽지 않다. 더는 햇볕에 단맛이 고이지 않는다 해도 서러운 마음이 들지 않는다. 

그렇다 해도, 비 오는 날에는 우산을 꼭 받치고 다녀야겠다. 손톱만치 남은 나의 색이 빗물에 마저 씻겨나가지는 않도록...

◆ 이명지 주요 약력 

△경북 영천 출생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문창과 졸업 △수필집 '육십, 뜨거워도 괜찮아' '헤이, 하고 네가 나를 부를 때' 등 다수 △제42회 조연현문학상, 제32회 동국문학상, 제6회 창작수필문학상 수상, 제17회 한국산문 문학상 △현재 (사)한국문인협회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