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VIBE] 이동일의 인사이드 K컬처...'호랑이는 살아있다'-②

연합뉴스 2024-07-01 22:00:35

[※ 편집자 주 = 한국국제교류재단(KF)의 2024년 발표에 따르면 세계 한류팬은 약 2억2천5백만명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또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해 지구 반대편과 동시에 소통하는 '디지털 실크로드' 시대도 열리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한류 4.0'의 시대입니다. 이에 연합뉴스 K컬처 팀은 독자 제위께 새로운 시선의 한국 문화와 K컬처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고자 전문가 칼럼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시리즈는 매주 게재하며 K컬처 팀 영문 한류 뉴스 사이트 K 바이브에서도 영문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이동일 연출가(연극학박사). 단국대 교수, 현 서강대 초빙교수.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 백남준과 '밀레니엄 프로젝트, DMZ 2000: 호랑이는 살아있다(Tiger Lives)' 연출, 덴마크 합작 프로젝트 '전쟁 후에(After war)' 등 총체극과 통섭형 작품 다수 연출.

이동일 교수

두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진지하고 유쾌했던 대화를 마치며 백남준 선생이 흔쾌히 참가동의서와 위임장에 서명해 주셨다.

다시 찾아간 뉴욕의 자택에서 중풍 치료를 위해 의사의 권유로 시작한 크레용 그림으로 백 선생은 정보사회의 메가바이트를 상징하는 코끼리와, 물고기, 꽃게, 나비, 기린, 말, 꽃등의 동물을 그리며 구상하고 계셨다.

비무장지대에 살고 있는 동물과 앞으로 살 동물을 상상하며 스케치하신 그림이다. 이 컨셉트 스케치와 글은 필자가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긴 협의의 과정 말미에 노자를 인용한 아이디어를 이야기하시다가 호랑이를 그려 주시며 '호랑이는 살아있다'라는 제목을 주셨다. 그런 다음 나에게 북한에서 체제 선전용으로 만들어진 호랑이와 사자의 결투를 찍은 동영상을 구해 달라고 요청하셨다.

뉴욕 자택에서 필자(오른쪽)와 '호랑이는 살아있다' 관련 회의하는 백남준 선생

나는 어렵게 구한 비디오와 더불어 1988 서울올림픽 기념 한국 전통 민화전에 출품됐던 호랑이의 다양한 모습을 보내 드렸다. 평소 유머 감각이 출중하셨던 선생은 우리 선조의 해학이 돋보이는 재미있는 호랑이의 표정을 무척 좋아하셨다. 또한 내가 개인적으로 수집한 방대한 분량의 한국 전통 굿 관련 서적과 영상도 보내드렸다. 그중에는 내가 직접 찍은 진도씻김굿의 로스앤젤레스 공연의 '지전무' 장면을 작품에 넣으라고 하셔서 나는 협업작가 크레딧에도 이름을 올리는 기쁨을 누리게 됐다. 선생의 유일한 한국태생의 조수였던 조승호 작가와 함께 나는 선생이 주신 아이디어를 편집해 확인받는 일을 뉴욕의 스튜디오에서 밤샘 작업을 마다하지 않고 이어갔다.

백남준 선생의 아이디어는 호랑이가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 밤새 이어지던 굿판의 소리풍경, 남대문 시장으로 대변되는 한국인의 강인한 생활력, 비빔밥이 상징하는 다문화 수용력까지 이어졌다.

선생은 인터뷰에서 1982년도부터 시작한 비디오 아트의 완결판이 '호랑이는 살아있다'라고 이야기하신 이유를 밝히셨다. 앞으로의 자기 예술의 흐름이 비디오아트를 지나고 로보틱 아트를 넘어서 레이저 아트에 도전하려는 의지라고 이야기해주셨다. 불편한 몸으로 인생의 마지막을 준비하며 하늘을 오가는 꿈을 새로운 미디어인 레이저와 물을 통해 '야곱의 사다리'를 형상화하고자 하는 실험정신에 고개가 숙어졌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은 선생이 쌓아 오신 명성에 금을 가게 할 수 있는 위험이 상존하고 무엇보다 비용도 많이 드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프로젝트 시작부터 도움을 주시던 백 선생의 친구이자 당시 구겐하임 미술관의 존 핸하르트 수석 큐레이터는 방한 후 필자와 동행해 DMZ 현장 방문, 유엔군 사령부 회의 참석 등을 도와주었다.

그가 구겐하임 미술관에 초대 기획한 백남준 선생의 차기작인 '야곱의 사다리'(레이저 아트를 이용한 작품)의 추진을 위해서는 이번 작품의 성공이 꼭 필요한 상황이었다. 백남준과 서로 존경하는 친구 사이였던 당시 새천년준비위원회 이어령 위원장께서도 정부 측과의 협의 과정에서 여러모로 도움을 주셨다.

초기에 구상했던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의 현장에서 시작하여 임진각으로 이동하는 공연의 동선을 확보하기 위해 유엔군 사령부와 긴밀한 협의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VIP 참석 여부 등 경호상의 문제로 판문점 가설무대 설치 공연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러서 자유의 다리 아래와 임진각 가설무대로 공연장은 확정됐다.

필자는 백남준 선생이 말년에 애독하시며 작품의 영감을 얻으셨던 노자의 '上善若水'에서 영감을 받아 평화의 상징을 물로 합일되는 음양오행의 바다라는 영상 이미지를 선생님께 제안했다. 또한 북한의 체제선전 비디오 사용으로 자칫 정치적인 색채를 띨 수 있는 통일 이슈를 희석하는 작업도 필요했다. 그래서 정주영 회장의 소 떼 방북 장면을 일종의 퍼포먼스로 해석해 그 장면과 선생의 기존 작품을 예술적으로 교차 편집하는 제안도 했다.

선생은 본인 기존작품의 여러 장면과 새로운 아이디어를 드로잉 스케치로 계속 주셨다. 이런 과정으로 지난했지만, 행복했던 과정을 통해 '백남준 비디오 아트의 완결판'이 완성됐다.

이후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이 실제로 평양에서 이루어지자 선생은 예술의 힘은 위대하다고 하시며 매우 기뻐하셨다.

긴 시간의 기획 미팅이 끝날 무렵에 선생은 나를 위해 '고향의 봄' 이나 '금강에 살으리랏다'를 한 손으로 연주해 주시곤 했다. 필자의 제안으로 선생님은 '금강에 살으리랏다'를 비티엘로양의 'NOISE OPERA'와 작품 중에 협연하신다. 통일을 저해하는 저급한 민족주의와 제국주의의 소리를 자동차 경보음 등 여러 가지 소음으로 표현한 노이즈 오페라의 소리를 뚫고 통일을 염원하는 '금강에 살으리랏다'를 목청 놓아 부르시는 선생의 공연 장면은 많은 이들의 마음을 숙연하게 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