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심제 우려 속 '194건 각하' 엄격 심사…"도입 취지 무색" 지적도
'재판 취소시 후속 재판은 어떻게' 절차 미비…대법, 연구반 운영

(서울=연합뉴스) 이미령 기자 = 법원 재판에 대한 헌법소원을 허용하는 재판소원 제도의 시행 한 달 만에 380건이 넘는 사건이 청구됐지만 아직 단 한 건도 본격 심사 문턱을 넘지 못했다.
헌재가 사실상의 '4심제' 운용으로 인한 사법질서 혼란 우려 속에 재판소원 대상을 엄격히 선별하겠다는 원칙을 일단 보여줬다는 평가가 나온다. 다만, 법원 재판에 가로막힌 이들에 대한 '헌법적 구제'를 명분으로 내세워 제도를 도입해놓고 실제로는 대다수를 걸러내 기대와 달리 기본권 침해 구제 기회가 충분히 주어지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온다.
헌재 입장에선 그간 법조계 내에서 대법원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조직·위상에서 한체급 열세로 평가받던 위상이 그 이상으로 올라가는 효과를 얻었지만, 명분으로 내건 국민 입장에선 아직 이렇다 할 체감을 하기 어렵다는 얘기도 있다.

12일 전자헌법재판센터상 지난달 12일 재판소원 제도 시행 이후 전날까지 약 한 달간 접수된 재판소원 사건은 총 384건 수준이다.
이 추세로 간다면 연간 약 4천600건 수준의 재판소원 사건이 쌓이게 된다. 지난해 접수된 기존 헌법소원 사건 수 3천66건을 훌쩍 뛰어넘는 수치다.
그러나 아직 단 한 건도 '첫 관문'인 사전심사를 통과하지 못했다.
헌재는 이달 7일까지 세 차례 사전심사에서 194건을 전부 각하했다.
헌재는 사건이 접수되면 헌법재판관 3명으로 구성된 지정재판부에서 법적 요건을 갖췄는지 판단하고 청구가 부적법하면 전원재판부의 본안 심리 없이 각하하는데, 이 사전심사 단계에서 모두 탈락한 것이다.
이재명 대통령에 대한 허위사실 공표로 유죄가 확정된 장영하 변호사, 유튜버 쯔양에게 수천만원을 뜯어내 실형을 확정받은 유튜버 구제역 사건도 각하됐다.
사전심사 각하 사유 가운데서도 가장 높은 문턱이 된 것은 '청구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 것이 명백한 경우'(4호)로, 총 128건이 청구 사유를 못 갖춰 각하됐다.
헌재법상 청구 사유는 확정된 재판이 ▲ 헌재 결정에 반하거나 ▲ 헌법·법률이 정한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 않았거나 ▲ 헌법·법률을 명백히 위반해 기본권을 침해한 경우다.
사실상 기본권 침해가 명백해야 사전심사를 통과할 수 있다는 것이어서 헌재 내부에서도 지금과 같은 사전심사 '무더기 각하'가 "예상됐던 일"이란 목소리가 나온다.
특히 헌재는 결정례를 통해 '법원의 사실 인정, 법률 적용의 당부(정당·부당)를 다투거나 재판 결과에 대한 단순한 불복에 불과하는 경우'는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기준도 제시하면서 제도 도입 과정에서 불거진 '4심제' 우려를 일단 초기에 일정 부분 덜어냈다는 평가가 나왔다.
다만 사전심사 문턱이 지나치게 높아 '기본권 침해 구제'라는 도입 취지와 맞지 않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이는 재판소원이 사실상 '4심제'로 운용될 경우 사회적으로 가져올 파장을 깊이 고민한 데 따른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아울러 문턱이 낮을 경우 사건이 폭주할 수 있어 현 단계 헌재의 역량·인력을 고려할 때 자칫 정상적 기능을 수행하기 어려울지 모른다는 현실적 우려가 작용한 게 아니냐는 평가도 있다.
헌법연구관 출신 김진한 변호사(클라스한결)는 "엄격한 사전심사도 중요하지만, 중요한 사건을 잘 발굴해서 헌법적 기준을 세우기 위해 재판소원 제도가 도입되지 않았느냐"며 "자칫 너무 엄격하게 '필터링'하는 데만 초점을 맞춰 좋은 헌법적 자원을 놓쳐버리는 결과가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우리보다 일찍 재판소원을 도입한 독일, 스페인 등도 헌법적으로 의미 있는 사건을 엄격하게 선별해 심사한다.
독일에선 1958년 '뤼트 결정'이 대표적 사례다. 당시 독일 법원은 나치 협력 전력이 있는 영화감독의 작품에 대한 불매운동을 주도한 언론인 에리히 뤼트에게 불매운동 금지를 명령했다. 그러나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는 민사 판결이라 하더라도 헌법상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해당 판결을 취소했다.

헌재는 재판소원 제도 운영과 관련한 세부 설계도 이어가고 있다.
앞서 제도 시행을 앞두고 법원 재판기록에 대한 송부 절차가 마련되지 않아 심리에 차질을 빚을 수 있단 우려가 나왔다.
이와 관련해 헌재는 이달 초 검찰과 업무협의를 통해 사건 심리에 필요한 형사재판 사건 기록을 전자 인증등본 형태로 주고받기로 합의했다.
다만 민사재판의 경우 아직 돌파구를 찾지 못한 상황이다. 헌재는 법원과 협의를 이어갈 계획이다.
또 전원재판부 회부 시 피청구인인 법원 내부 통지 대상도 구체화했다. 심판 대상이 대법원 판결인 경우 대법원장에게, 하급심 판결인 경우 해당 법원장에게 회부 통지와 함께 답변서를 요청할 예정이다.
헌재는 또 재판소원 제도 시행으로 증가한 업무량에 대응하고자 현재 70여명인 헌법연구관을 20명 추가 채용한다는 계획이다.
반면 재판소원이 인용되면 향후 법원 재판은 어떤 절차를 거쳐 다시 진행되는지, 확정된 재판을 전제로 행해진 집행의 효력은 어떻게 되는지 등 재판소원 후속 절차에 대한 설계는 아직 미비한 상황이다.
헌재는 이런 문제는 기본적으로 재판소원 '사후'에 발생하는 법적 문제라는 입장이다.
그러나 일각에선 재판소원 제도를 도입하면서 이와 관련해 법원 재판이 영향을 받는 것은 당연히 예상되는 문제인데도 구체적 방안을 고민하지 않고 '개문발차'한 것은 무책임한 측면이 있고, 까다로운 법리상 문제는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법원에 떠넘긴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결국 재판소원 도입을 반대했지만 전격 시행에 맞닥뜨린 사법부가 대책 역시 찾을 수밖에 없게 된 상황이다.
대법원 소속 법원행정처는 재판소원 시행 대응을 위해 '재판소원 후속조치 연구반'(반장 이규홍 서울고법 부장판사)을 꾸렸다. 6개월가량 활동해 올해 안에 연구 결과를 낸다는 계획이다.
already@yna.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