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묵한 선의'가 전하는 삶의 희망…김혜진 소설 '달걀의 온기'

연합뉴스 2026-04-10 00:00:18

네 번째 작품집 출간…타인과의 관계 다룬 7편 수록

소설집 '달걀의 온기' 펴낸 김혜진 작가

(서울=연합뉴스) 김기훈 기자 = 젠더, 노인, 일자리, 주거 등 사회의 냉혹한 현실을 파헤치며 소외된 존재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비춰온 소설가 김혜진(43)이 네 번째 소설집 '달걀의 온기'를 펴냈다.

김유정문학상 대상작 '푸른색 루비콘'을 비롯해 '관종들', '빈티지 엽서' 등 타인과의 관계를 다룬 일곱 편의 단편이 수록됐다.

소설집의 문을 여는 '관종들'에서 주인공인 '정해'와 '영기' 부부는 평소 이웃들의 무신경하고 무질서한 행동에 서슴없이 목소리를 내곤 한다. 하지만 그 탓에 오지랖 넓은 사람으로 몰려 이웃의 눈총을 받는다.

그러던 어느 추운 겨울날 부부는 길에서 떨고 있는 아이들을 목격하고 고민 끝에 경찰에 신고하는데, 아이들의 어머니가 나타나면서 이야기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흐른다.

"그들은 아이들을 생각하고 불안과 걱정을 나누는 데 시간과 마음을 썼다. 그건 정해가 출퇴근길에 정자를 일부러 지나가는 것처럼, 영기가 산책 삼아 잠깐씩 정자 근처를 배회하는 것처럼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 중 하나였다. 최소한의 일." (28∼29쪽)

또 '푸른색 루비콘'은 주인공인 '나'가 어느 날 교회에서 남루한 행색의 한 남자를 만나 벌어지는 일을 다룬 작품이다.

'나'는 그의 부탁으로 함께 차를 몰고 그가 운영하는 양봉장으로 가게 되는데, 양봉장으로 가는 길에 우여곡절을 겪는다. 아내와 사별한 뒤 타인을 만나는 일에 어색해진 '나'는 그와 엮이게 된 사실이 문득문득 후회스럽다. 하지만 모든 일이 지나간 뒤 그가 내어준 꿀물 한잔에 '나'는 묘한 평화를 느낀다.

'달걀의 온기'

표제작 '달걀의 온기'의 주인공은 투자 사기를 당한 뒤 아버지가 살던 고향 집을 처분하러 내려온 '선희'. 선희는 마을에서 어린 여자아이 '민지'를 자꾸 마주친다.

버려지듯 조모에게 맡겨진 민지는 혼자 닭을 키우고 주변 어른들에게 달걀을 팔며 생계를 이어간다. 그런 민지의 다부진 태도와 한발짝 뒤에서 민지를 챙기는 마을 사람들의 살뜰한 태도에서 선희는 뭉클함을 느낀다.

"선희는 지갑을 가지러 집 안으로 들어가며 청란을, 그 청란이 품고 있는 온기를 떠올렸다. 그러나 왜 그것이 돌연 마음을 뭉클하게 하는지, 왜 당혹스럽고 부끄러운 감정을 불러오는지에 대해선 깊이 고민해보지 못했다. 그것이 자기 삶에는 없다고 여겼던, 스스로 감쪽같이 지워버렸던 누군가의 보살핌과 애정 같은 것을 일깨웠다는 사실을 안 건 시간이 더 흐른 후였다." (233∼234쪽)

이 책의 '해설'을 쓴 정주아 문학평론가는 "작가의 태도에는 '현실에 관심을 기울인다'라는 말 정도로는 부족한 무엇이 있다. 그것은 깊은 염려를 대단히 절제된 방식으로 표현하는 태도"라고 분석했다.

이어 "작가의 일이란 젠더, 노인, 일자리, 주거 같은 키워드에 의해 추상적으로 뭉개진 대상에 생생한 얼굴과 삶의 사연을 부여하는 것"이라며 "평범한 생활 속에 쌓여 있는 시간의 더께를 알아보는 작가는 절로 신중하고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작가가 바라보는 일상은 아무리 평범하다고 해도 결코 납작하지 않다. 작가는 이런 평범함에서 평면성을 분리해, 하루하루의 삶이 얼마나 복잡하고 고단한 것인가를 그려낸다.

다만 삶을 함부로 재단하거나 평가하지 않고, 관조하되 방치하지 않는 자세로 일상을 섬세히 관찰한다.

또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은 오해나 상처를 주고받지 않기 위해 타인과 애써 거리를 유지하지만, 결정적 순간에 끝내 손을 내민다.

소설가 조해진은 '추천사'에서 작품 속 인물들의 이런 태도를 "과묵한 선의"라고 함축적으로 표현했다.

김혜진은 지극히 절제된 문장으로 '과묵한 선의'가 작동하는 순간 미세한 파동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그 파동이 닫힌 내면에 균열을 만들어 내는 순간 서늘하고 건조한 문장을 비집고 어떤 뜨겁고 뭉클한 것이 번져 나온다.

추운 겨울날 손 안에 쥔 달걀처럼, 연약한 껍질 속 지켜온 생의 온기가 은은하게 다가오는 작품이다.

창비. 256쪽.

kihun@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