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 주 = 한국국제교류재단(KF)의 2024년 발표에 따르면 세계 한류 팬은 약 2억2천500만명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또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해 지구 반대편과 동시에 소통하는 '디지털 실크로드' 시대도 열리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한류 4.0'의 시대입니다. 연합뉴스 동포·다문화부 K컬처팀은 독자 여러분께 새로운 시선으로 한국 문화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고자 전문가 칼럼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시리즈는 매주 게재합니다]

지난 칼럼에서 우리나라의 전통 기법으로 만들어지는 포도 증류주의 존재에 대해서 독자 여러분께 알려드렸다. 조선시대에 포도는 매우 비싸고 귀한 과일이었기 때문에 포도로 만든 증류주 '포도소주'는 사실상 양반 고관대작들이나 맛보는 술이었다. 우리나라에 이러한 배경에서 만들어진 포도소주가 지금도 그때 방식 그대로 생산되고 있다면 이는 매우 반가운 일이다.
충남 천안은 대표적인 포도 생산지다. 천안은 알이 굵고 당도가 높은 특산물 '거봉포도'로 유명하다. 이곳의 와이너리 두레양조에서는 거봉을 발효시켜 와인을 만든 뒤, 코퍼 스틸(구리 증류기)을 활용해 감압 증류 방식으로 투명하고 깔끔한 원액을 뽑아낸다. 이를 다시 오크통에 넣어 오랜 시간 숙성시키면 특유의 황금빛과 함께 바닐라, 초콜릿 향이 거봉의 달콤한 향과 어우러지는 '두레앙 브랜디'가 탄생한다. 프랑스 코냑 지방에 위니블랑 품종이 있다면, 한국 천안에는 거봉이 그 자리를 훌륭히 대체하고 있는 셈이다.

전통적인 포도 주산지인 충북 영동의 활약도 눈부시다. 영동에 자리한 산막와이너리의 '환희'가 그 훌륭한 예다. 환희는 직접 재배한 고품질 레드와인을 100% 순동 알렘빅(Alembic) 증류기로 상압 증류한 뒤 오랜 시간 오크통에 숙성시킨 수제 브랜디다. 거친 불기운 대신 천천히 정성스레 열을 전달해 얻어낸 이 황금빛 진액은, 세계 최고 권위의 주류 품평회인 IWSC에서 한국 브랜디 최초로 브론즈상을 거머쥐며 프랑스 코냑 못지않은 우아함을 자랑했다. 경기도 화성의 송산 포도를 활용해 놀라운 성취를 이뤄낸 샌드리버 와이너리의 '사강 40' 역시 빼놓을 수 없다. 다년간 숙성시킨 캠벨얼리 올드 와인과 영 와인을 절묘하게 블렌딩한 뒤 상압에서 두 번 증류하여 완성한다. 건포도의 농밀한 단맛과 견과류의 고소함이 특징인 이 술은 세계적인 주류 품평회 'CMB 스피리츠 셀렉션'에서 당당히 금메달을 차지하며 우리 증류주의 위상을 한껏 드높였다.

경북 지역의 약진 또한 두드러진다. 일조량이 풍부한 상주의 젤코바와이너리에서 상주 포도 100%로 빚어낸 '바쿠스의 눈물 39'는 최근 한국와인대상 품평회에서 브랜디 부문 골드상을 수상하며 탄탄한 증류 기술을 증명했다. 또 전국 최대 와인 산지로 급부상한 경북 영천에서는 고도리와이너리가 거봉과 캠벨 등을 구리 증류기로 내려 포도 본연의 화려한 향취를 응축한 '고도리 브랜디 징기스칸'를 선보이고 있다. 그리고 영천의 조흔와이너리에서는 MBA(머스캣 베일리 에이)와 거봉을 블렌딩한 뒤 미국 캘리포니아산 오크통에서 12개월간 숙성시켜 아름다운 호박색과 부드러운 목 넘김을 자랑하는 '칸'(Khan)을 출시해 젊은 세대의 미각까지 사로잡고 있다.

프랑스 코냑 지방에 위니블랑 품종이 있다면, 한국에는 거봉, 캠벨얼리, MBA라는 든든한 우리 포도들이 그 자리를 훌륭히 대체하고 있는 셈이다. 더욱 고무적인 것은 K-브랜디의 진화가 과거에 머물러 있지 않고 현재 진행형이라는 점이다. 국가 차원의 연구 개발도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최근 농촌진흥청은 국산 포도를 활용해 단 한 번의 증류만으로도 알코올 40도 내외의 고품질 과실 증류주를 만들어내는 효율적인 공정 기술을 개발해 일선 양조장들에 보급하기 시작했다. 기존에는 여러 번 증류해야만 잡취를 없앨 수 있었지만, 이 새로운 기술 덕분에 거친 알코올 향은 획기적으로 줄이고 포도 고유의 신선한 과일 향과 부드러운 목 넘김은 극대화할 수 있게 되었다.
머지않아 우리는 각 지역의 토양과 기후, 즉 한반도의 '테루아'를 고스란히 담아낸 더 다양하고 수준 높은 지역 포도 증류주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전통주라고 하면 으레 막걸리나 쌀로 빚은 맑은 청주만을 떠올리는 편견은 이제 접어두어도 좋다. 과일을 발효시켜 와인을 만들고, 이를 다시 끓여내 한 방울의 이슬 같은 브랜디까지 빚어내던 선조들의 세련되고 사치스러웠던 미식 문화는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수백 년 전 가마솥과 소줏고리에서 똑똑 떨어지던 맑은 포도소주는, 오늘날 구리 증류기와 오크통 속에서 익어가는 훌륭한 K-브랜디들로 다시 만개하고 있다. 한 방울의 포도소주 안에 담긴 우리 술의 이토록 깊고 넓은 스펙트럼, 이것이 바로 세계 시장의 내로라하는 명주들과 당당히 어깨를 견줄 'K-리큐르'의 진정한 경쟁력이자 찬란한 미래다.
신종근 전통주 칼럼니스트
▲ 전시기획자 ▲ 저서 '우리술! 어디까지 마셔봤니?' ▲ '미술과 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