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옥에서 단순한 삶을 살며 그림에만 몰입했죠"

연합뉴스 2026-04-08 17:00:10

안동 락고재서 3개월 '아트 레지던시' 마친 佛 화가 르글리즈·블랑댕

한국의 자연과 정적에서 영감…한옥·자연 담은 작품 36점 완성

한불 수교 140주년 맞아 주한 프랑스대사관서 첫 전시회

하회마을 숙소에서 포즈 취한 르글리즈와 블랑댕

(안동=연합뉴스) 박현수 기자 = "우리는 천국에 왔어요. 그림을 위한 수도사 같은 삶을 보냈죠. 한옥에서의 단순한 삶과 고요한 자연이 우리를 작업의 본질로 이끌었습니다."

지난달 31일 경북 안동 하회마을. 낙동강이 굽이치는 마을 끝자락, 한옥호텔 락고재에서 지난 1월부터 3개월을 보낸 프랑스 화가 프레드릭 르글리즈와 티모테 블랑댕은 밝은 표정으로 체류 경험을 이렇게 압축했다.

이번 '아트 레지던시'는 한불 수교 140주년을 맞아 락고재문화재단과 주한 프랑스대사관의 MOU 체결을 통해 마련된 연례 프로그램이다. 매년 두 명의 프랑스 예술가를 초청해 지속적인 국제 문화 교류를 이어갈 예정이다.

르글리즈는 "도자기 컬렉션의 식물과 산을 모티프로 삼은 정물화를 통해 구상과 추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한국 전통 미술 특유의 단순함과 기하학적 아름다움을 체감했다"고 말했다.

블랑댕은 "안동의 빛과 색감이 프랑스 알프스와 완전히 달랐다"며 "작업실에서 마을로 돌아오는 저녁 산책, 이른 아침 스치는 빛을 포착한 풍경화로 한국의 겨울을 새롭게 표현했다"고 밝혔다.

연합뉴스와 인터뷰하는 티모테 블랑댕

두 작가는 서울에서 처음 인연을 맺은 뒤 안동 락고재에 함께 입주했다. 고향을 떠나 3개월이라는 시간을 보내는 것은 두 사람 모두에게 낯설었다.

블랑댕은 "고향 밖에서 이렇게 오랜 시간을 보내는 경험 자체가 처음이지만 마음이 편안했다"고 말했다.

르글리즈 역시 "외부의 방해 없이 오로지 그림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무엇보다 좋았다"며 레지던시의 의미를 강조했다.

파리를 기반으로 활동해 온 르글리즈에게 안동에서의 시간은 도시와는 전혀 다른 감각을 제공했다. 그는 "파리에서는 수많은 자극 속에서 늘 강렬함을 요구받았다"며 "이곳에서는 작업실로 걸어가며 새소리를 듣고, 침묵에 귀를 기울일 수 있었다"고 했다.

이어 "그런 경험들이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내면의 평화를 느끼게 해줬다"고 덧붙였다.

레지던시 기간 두 사람의 일상은 일정한 리듬을 유지했다. 아침에 일어나 간단히 식사하고, 작업실로 이동해 하루 대부분을 그림에 몰두한 뒤 저녁 무렵 다시 한옥으로 돌아오는 생활이 반복됐다.

르글리즈는 이를 "수도사 같은 리듬이지만, 오직 그림을 위한 시간"이라고 표현했다. 블랑댕 역시 "기상, 식사, 작업, 귀가로 이어지는 단순한 일상이었지만 그 안에서 집중도가 극대화됐다"고 설명했다.

작품 배경으로 포즈 취한 르글리즈

이들은 매일 함께 작업실을 오가며 긴 산책을 이어갔다. 르글리즈는 "그 길에서 삶의 경험과 그림에 대한 생각을 나눴고, 그 덕분에 서로를 깊이 이해하게 됐다"고 말했다.

블랑댕도 "단둘이 오랜 시간을 보내며 색채와 프레임, 풍경에 대해 끊임없이 대화를 나눈 것이 작업에 좋은 시너지 효과를 냈다"고 밝혔다.

이러한 교류는 실제 작업 성과로 이어졌다. 두 작가는 이번 체류 기간 평소보다 훨씬 많은 작품을 완성했다.

르글리즈는 "동료의 격려 덕분에 혼자였다면 시도하지 않았을 작업도 해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블랑댕 역시 "함께 작업한 경험이 균형을 잡아줬다"고 했다.

두 작가의 작품 세계에는 한국의 자연이 깊이 스며들었다. 르글리즈는 "숲을 지나 강을 바라보며 달이 차오르는 장면은 매우 강렬했다"며 보름달이 뜬 밤 강가를 걸었던 경험을 가장 인상적인 순간으로 꼽았다.

블랑댕은 "빛에 따라 매일 달라지는 풍경이 놀라웠다"며 "절벽과 강, 숲 같은 단순한 자연이 오히려 더 깊은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전했다.

작업에 열중인 블랑댕과 르글리즈

이처럼 자연에서 받은 영감은 한옥 생활과 맞물려 작업의 변화를 이끌었다. 르글리즈는 "한옥은 꼭 필요한 것만 남아 있는 공간"이라며 "그 단순함이 작업에서도 본질로 향하게 했다"고 말했다.

블랑댕은 "한옥 내부뿐 아니라 외부 풍경과 구조가 주는 미학적 경험이 컸다"며 "환경 전체가 작업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고 설명했다.

두 작가는 한국에서의 체류를 "우연한 기회이자 새로운 발견"으로 받아들였다.

르글리즈는 "도착 당시가 겨울이었고 매우 추웠지만, 동시에 '천국에 온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회상했다.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 시간은 쉽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이를 창작에 집중할 수 있는 조건으로 받아들였다.

르글리즈는 "가족이 그립지만, 동시에 자신과 작업에 몰입할 수 있는 특권 같은 시간"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면서 "한국에서 김환기라는 중요한 화가를 새롭게 알게 된 것도 의미 있는 경험"이라고 덧붙였다.

하회마을 낙동강변길 걷는 르글리즈와 블랑댕

락고재는 이번 프로그램을 통해 외국 작가들이 한국 문화를 직접 체험하고, 이를 작품으로 승화하는 데 의미를 두고 있다.

르글리즈는 "한국의 분위기와 예술, 사람들 모두 인상적이었다"며 "이곳의 삶은 훨씬 평화롭게 느껴졌다"고 말했다. 블랑댕 역시 "안전하고 친절한 환경이 매우 좋았다"고 덧붙였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두 작가는 공통적으로 더 많은 레지던시 참여를 언급했다.

블랑댕은 "새로운 장소에서 빛과 풍경을 발견하는 과정이 곧 성장"이라며 "다양한 경험을 통해 결국 모든 것을 더 잘 그릴 수 있게 되고 싶다"고 말했다.

르글리즈 역시 "프랑스 미술계를 넘어 세계의 다양한 예술가들과 만나고 싶다"며 "새로운 장소에서의 경험이 곧 예술을 확장하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하회마을 한옥호텔 락고재(樂古齋) 전경

두 작가의 작품은 지난달 26일 주한프랑스대사관에서 처음 공개됐다. 올해 한불 수교 140주년을 맞아 열린 이번 전시는 한국 전통 공간과 프랑스 현대 미술의 만남을 통해 양국 문화 교류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주한프랑스대사관 피에르 모르코스 문화교육과학참사관은 "프랑스 대사관은 재정·현물 지원과 함께 레지던시 운영 가이드라인을 제공했다"며 "작가들이 한국 땅에서 한국 문화와 연결된 새로운 작품을 창작한 것이 이번 프로그램의 가장 큰 성과"라고 평가했다.

안지원 락고재문화재단 부대표는 "한국 문화 해외 선양이라는 재단의 목표를 외국 작가들이 한국을 경험하고 그 감동을 작품으로 전하는 방식으로 실현하고자 했다"며 "작가들이 추운 겨울 외진 마을에서 꿋꿋하게 작업하는 모습을 보며 큰 보람을 느꼈다"고 말했다.

작품에 대해서도 호평이 이어졌다. 전시를 관람한 색채 전문가 김민경은 "프랑스 작가들의 시선으로 본 한국의 빛과 색감이 따뜻하고 행복하게 표현됐다"고 했다. 파리에서 40년 생활한 최이본씨는 "한국 풍경이지만 한국인이 그린 것과 다른 리프레싱한 느낌"이라고 평가했다.

프랑스 대사관은 앞으로도 부산·부천·청주 등에서 프로그램을 확대할 계획이다. 락고재문화재단 역시 레지던시를 연례 사업으로 이어가며 더 많은 해외 작가들을 한국 전통 공간으로 초대할 예정이다.

phyeonsoo@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