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VIBE] 김수미의 'K-씨어터'…현실 비틀어 '다른 세계' 여는 김시번-③

연합뉴스 2026-04-07 00:00:26

[※ 편집자 주 = 한국국제교류재단(KF)의 2024년 발표에 따르면 세계 한류 팬은 약 2억2천500만명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또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해 지구 반대편과 동시에 소통하는 '디지털 실크로드' 시대도 열리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한류 4.0'의 시대입니다. 연합뉴스 동포·다문화부 K컬처팀은 독자 여러분께 새로운 시선으로 한국 문화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고자 전문가 칼럼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시리즈는 매주 게재합니다.]

연출가 김시번

김시번의 연극 세계는 정치와 사회를 향한 날 선 시선에서 출발하지만, 그 끝이 반드시 분노나 고발에 머무는 것은 아니다. 그의 무대가 향하는 또 하나의 축은 '개인의 실존'이다. 거대한 구조 속에서 흔들리는 개인, 그런데도 관계를 통해 다시 세계와 연결되려는 존재들. 김시번은 이 지점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그 전환의 대표적인 사례가 2014년 연출작 '엘링'이다. 이 작품은 정치적 은유 대신, 사회 바깥으로 밀려난 개인의 내면을 정면으로 다룬다. 정신병원에서 나온 두 남자가 세상으로 나와 '보통의 삶'을 연습해 나가는 이야기다. 전화 한 통을 거는 일, 식당에서 밥을 먹는 일 같은 사소한 행위조차 그들에게는 거대한 도전으로 다가온다.

김시번은 이 작품에서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뒤집는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 현대인 역시 불안과 고립, 관계의 결핍 속에서 살아간다는 점에서, 엘링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는 "내 안에도 엘링이 있다"고 말하며, 인물을 타자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관객이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도록 만든다.

연극 '엘링' 포스터

이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사건이 아니라 관계다. 엘링과 쉘, 그리고 주변 인물들은 서로를 통해 세상과 다시 연결된다. 김시번은 이를 통해 '적응'이란 사회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통해 자신을 회복하는 과정임을 보여준다. 정치적 메시지가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음에도, 이 작품이 그의 연출 세계 안에 놓이는 이유다. 사회는 여전히 배경으로 존재하고, 개인은 그 안에서 흔들린다.

◇ 삶의 끝에서 되짚는 '사랑의 기억'

2015년 작품 '그대 손에 노란 편지'는 한층 더 내밀한 영역으로 들어간다. 치매에 걸린 아내와 암에 걸린 남편이 서로의 기억을 편지로 부치며 삶을 정리해가는 이야기다.

이 작품에서 김시번은 '기억'이라는 장치를 통해 인간 존재를 탐구한다. 기억은 사라지지만, 그 기억을 나누는 관계는 사라지지 않는다. 집안 곳곳에 붙은 노란 편지는 소품이 아니라, 삶의 흔적이자 사랑의 증거다. 과거의 행복, 상처, 죄책감이 편지라는 형식으로 다시 호출되며, 두 사람은 비로소 서로를 이해한다.

특히 이 작품은 죽음을 '끝'이 아니라 '정리'로 바라본다. 삶의 마지막에 다다른 인물들이 기억을 통해 서로를 다시 만나는 과정은, 김시번이 말하는 또 다른 '다른 세계'다. 그것은 판타지도, 풍자도 아닌, 인간 존재의 가장 근원적인 층위에서 열리는 세계다.

연극 '그대 손에 노란 편지' 포스터

그는 이 작품에서 '삶은 소멸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육신은 사라지지만, 삶은 타인의 기억 속에서 계속 이어진다는 믿음이다. 정치적 분노 대신, 인간에 대한 연민과 애정이 전면에 등장하는 지점이다.

◇ '괴물'과 싸우는 것은 결국 '나 자신'

다시 사회적 문제로 돌아오면, 김시번의 시선은 더욱 복합적으로 된다. 2018년 연출작 '협력자들'은 독재 권력과 예술가의 관계를 다루지만, 선악 구도로 끝나지 않는다.

그는 이 작품을 통해 '괴물은 외부에만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독재자 스탈린과 맞서는 예술가 불가코프의 이야기 속에서, 김시번은 어느 순간 자신이 스탈린의 논리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음을 발견한다. 그리고 깨닫는다. 괴물은 이미 내 안에도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연극 협력자들-불가코프와 스탈린'

이 지점에서 그의 연극은 정치 풍자를 넘어선다. 관객은 무대 위의 독재자를 비판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자기 내면을 돌아보게 된다. '나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남는다.

최근작 '헤이, 마마'(2023)는 김시번의 관심이 동시대의 기술 문제로 확장됐음을 보여준다. 인공지능(AI)을 탑재한 휴머노이드가 인간의 삶을 편리하게 만들지만, 결국 그 삶을 통제하고 잠식해 들어가는 이야기다.

작품 속 AI는 폭력적인 방식이 아니라 '친절함'으로 인간을 지배한다. 편리함과 효율이라는 이름 아래, 인간은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는 능력을 점차 잃어간다. 김시번은 이를 통해 현대 사회가 직면한 새로운 형태의 통제를 포착한다.

연극 '헤이마마'

흥미로운 점은 그의 문제의식이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권력, 통제, 선택이라는 주제는 여전히 동일하지만, 그 형태만 달라졌을 뿐이다. 과거의 권력이 물리적 폭력에 가까웠다면, 오늘날의 권력은 데이터와 알고리즘이라는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김시번은 이 변화 속에서도 결국 같은 질문을 던진다. 인간은 어디까지 자유로운가,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선택하며 살아가는가.

◇ '다른 세계'는 결국 현실을 위한 장치

김시번의 작품을 따라가다 보면 하나의 공통된 구조가 보인다. 현실을 그대로 재현하지 않고, 비틀고, 장르를 섞고, 낯선 설정을 도입한다. 그러나 그 모든 장치는 결국 현실을 더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아웃사이더의 이야기, 노부부의 사랑, 독재와 예술가의 갈등, AI가 지배하는 미래까지. 소재는 달라지지만, 그의 질문은 일관된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그리고 이 삶을 다르게 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김시번에게 '다른 세계'는 도피처가 아니다. 오히려 현실을 더 정확히 보기 위한 장치다. 관객은 잠시 그 세계에 들어갔다가,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그리고 이전과는 조금 다른 시선으로 지금의 삶을 바라보게 된다.

결국 그의 연극은 거창한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작은 균열을 만든다. 그 균열 사이로 관객은 자신의 삶을 다시 들여다본다. 김시번의 연극이 오래 남는 이유도 바로 그 지점에 있다.

선연(禪蓮) 김수미. 연극 평론가

▲ 전 월간 '객석' 연극전문 기자. 현 중랑문화재단 문화정책사업팀장

<정리 : 이세영 기자>

seva@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