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꽃 없어도 괜찮다…버려진 '초록' 품는 '식물유치원'

연합뉴스 2026-04-05 08:00:12

재개발단지서 '식물 구조'해 1천개 새 주인 찾아준 백수혜씨

"사람은 취업·결혼 쫓기지만…각자의 속도로 사는 식물들 기특"

공덕동 '식물유치원' 원장 백수혜씨

(서울=연합뉴스) 정지수 기자 = 추어탕 위 올리는 '방아잎'부터 작은 은행나무까지. 서울 마포구 만리재옛길 굽이진 골목 끝자락, 작은 주택의 정원에는 길 위에서 스쳐 지나갈 법한 들풀들이 가득 들어차 있다.

이곳은 버려진 식물들이 '구조'돼 새 주인을 기다리는 '식물 유치원'이다.

5일 식목일을 앞두고 지난달 28일 이곳에서 만난 백수혜씨는 2021년부터 식물을 구조해 무료 분양하는 일을 하고 있다. 그동안 백씨의 손을 거쳐 새 주인을 찾아간 화분은 어림잡아 1천개가 넘는다. 백씨는 "제가 식물을 구조할 일이 없도록 '버리지 않는 문화'가 정착되기를 꿈꾼다"고 말했다.

백씨의 활동은 2021년 여름 공덕1구역 인근 주택인 이곳으로 이사하며 시작됐다. 재개발 단지에서 나온 쓰레기 더미 속의 '초록'이 그의 눈에 띄었다. 백씨는 "왜 쓰레기통 속에 이런 초록색이 있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고 회상했다. 그길로 서울 곳곳 재개발 단지를 돌며 버려진 화분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영국 런던에서 예술을 공부하며 체득한 '버리지 않는 문화'가 기본 철학이 됐다. 쓰던 물건을 자연스럽게 사고파는 유럽의 중고 거래를 경험하며 버려진 물건을 수습하는 데 거리낌이 없어졌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주로 서울의 재개발지에서 구조 활동을 하지만 버려진 식물에 대한 제보도 잇따른다. 다만, 식물 구조에는 엄격한 원칙이 있다. '유기' 여부 확인이 최우선이다. 혹시나 주인이 있는 식물은 아닌지 시간을 두고 살피고, 돌봄을 받지 못하는 게 확실해지면 구조에 나선다.

그래서 유치원으로 데려온 식물은 물에 담가두거나 다른 화분에 옮겨 심어 생명을 되찾게 한다. 이렇게 생기를 회복한 식물들은 한 달에 한 번 정도 열리는 '졸업식'에서 새 주인을 찾는다.

백수혜씨가 구조한 은행나무

작은 주택의 정원 한 켠에서 아무 보수도 없이 5년간 식물 구조에 나설 수 있었던 동력은 십시일반 모인 응원이었다. 백씨는 "화려한 꽃도 없고 조금 못생기고 시들해 보이는 아이들도 예쁘게 키워보겠다며 마음을 내주는 분들이 있어 계속할 수 있었다"고 떠올렸다.

그도 처음에는 '초보 식집사(식물집사)'였다. 처음 구조한 알로카시아의 독성을 모르고 통증에 시달리기도 했고, 애써 데려온 은행나무가 비료 성분 때문에 죽기도 했다. 시행착오는 밑거름이 됐다. 알로카시아는 무사히 번식해 기념으로 둔 하나만 빼고 모두 분양됐고, 비료 없는 '진짜 흙'을 사용하는 법도 배웠다.

혼자 시작한 일이었지만 어느새 작은 움직임은 이곳저곳 퍼져나가고 있다.

그는 "옥상 화단을 꾸미고 싶다"는 근처 대안학교 어린이들의 요청으로 함께 재개발지에 가 버려진 식물을 구조한 것을 가장 기억에 남는 일로 꼽았다. 최근에는 식물이 궁금하다는 대학생들의 연락도 종종 이어진다.

식물 유치원이 필요 없는 세상을 꿈꾸는 백씨지만, 버려진 식물을 돌보며 얻는 깨달음은 깊다. 좁은 정원에서 들풀과 씨름하며 배운 건 '자신만의 속도'로 살아가는 법이라고 백씨는 말했다.

"사람은 몇 살에 취업하고, 몇 살에 결혼하고…, 이런 부담이 있잖아요. 식물은 3월에 꽃 피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9월에 꽃 피는 아이가 있고, 아예 꽃을 안 피우는 아이도 있어요. 무던하면서도 각자의 모습으로 열심히 사는 모습이 기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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