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역은 무대, 시민은 배우…걷다 보니 서울이 낯설어졌다

연합뉴스 2026-04-04 12:00:03

참여형 퍼포먼스 '리모트서울'…헤드폰 쓰고 2시간 걸으며 강남 탐방

에스컬레이터에서 무용수 흉내·길거리 달리기 경주로 새로워진 일상

참여형 퍼포먼스 '리모트 서울'

(서울=연합뉴스) 최주성 기자 = "즐겁게 봤다면, 배우들에게 박수를 보내줘!"

무대 뒤편으로 걸어가는 배우들을 바라보며 헤드폰을 착용한 30명의 관객이 안내에 따라 일제히 손뼉을 치고 손을 흔든다. 그런데 배우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관객의 환호에 당황스러운 기색을 보이고 관객을 향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사실 이곳은 서울 지하철 동작역 내 환승 개찰구 앞이다. 배우는 지하철을 이용하는 시민, 헤드폰을 낀 관객들은 지하철역을 한 편의 연극이 진행되고 있는 무대로 바라보도록 지시받은 사람들이다.

'리모트 서울' 포스터

지난 10일 개막한 리미니 프로토콜의 참여형 퍼포먼스 '리모트 서울'은 익숙한 장소에서의 낯선 상호작용을 통해 민망함과 쾌감이 섞인 감정을 선사했다. 오묘한 감정을 경험하고 나니 도시는 언제 어떤 상황이 발생할지 모르는 곳, 호기심을 유발하는 공간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리모트 서울'은 관객이 헤드폰 넘어 인공지능 음성 안내를 따라 2시간 동안 시내를 걸으며 일상을 낯설게 경험하는 퍼포먼스다. 2000년 결성된 독일의 공연단체 리미니 프로토콜을 대표하는 시리즈로 2013년 베를린에서 초연된 이후 뉴욕, 런던, 상하이 등 세계 65개 도시에서 진행됐다.

서울에서 '리모트' 시리즈가 진행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현지 연출 외르크 카렌바워는 이번 공연을 위해 3주간 서울의 지형과 사회 문화적 배경, 시민들의 행동을 관찰하며 퍼포먼스를 설계했다.

'리모트 서울' 관객에게 지급되는 헤드폰과 교통카드

퍼포먼스는 출발 지점인 현충원에서 헤드폰과 교통카드를 지급받는 것으로 시작된다. 헤드폰을 착용한 관객들은 자신을 '지연'이라고 소개하는 인공지능의 지시를 받으며 걷고, 때로 지하철에 탑승해 목적지까지 이동하게 된다.

이날 2시간 동안 약 4천걸음을 옮기는 동안 인공지능은 '인도가 없으니 차를 조심하라', '멀리 보이는 크레인 방향으로 걸어라' 등 섬세한 지시를 건넸다. 지하철을 기다리는 대목에서는 '열차가 오더라도 신호를 줄 때까지 기다려'라고 지시하며 참가자들이 함께 움직이도록 이끌었다.

인공지능은 동시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며 관객이 일상적 상황에 놓여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렸다. 거리를 걷는 도중에는 '앞장서서 가는 사람을 믿을 수 있어?'라고 물으며 주의를 환기하고, 현충원 묘비들을 지날 때는 삶과 죽음에 관한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리모트 서울' 참가자들

다른 관객들과 함께 시민들의 눈길을 끄는 행위를 하는 순간은 강렬한 체험을 제공한다. 초반부 '앞서 걷는 사람을 제쳐보라'는 지시에도 망설이던 관객들은 지하철역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며 발레 무용수처럼 머리 위로 손을 뻗고, 거리에서 달리기 경주를 펼치며 갈수록 퍼포먼스에 깊이 몰입했다.

평소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던 장소를 탐구하며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를 돌아보는 2시간의 경험은 끝을 맺은 뒤에도 여운을 남겼다. '다시 도시로 섞여 들어갈 준비를 해라'는 마지막 지시를 끝으로 헤드폰을 벗은 뒤 지하철역에서 마주한 퇴근길의 인파는 평상시보다 생경하고 어색하게 느껴졌다.

관객 조다은(31)씨는 "평소에 도시를 어떻게 감각하며 살고 있었나 돌아볼 수 있었고, 개인이 아니라 시스템의 조각으로 살아가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했다"며 "눈에 띄는 행동을 했을 때 마주하게 되는 (시민들의) 반응이 재밌었지만, 지나가는 사람을 배우로 여기는 순간은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는 소감을 남겼다.

'리모트 서울'은 다음 달 10일까지 진행된다.

리미니 프로토콜 '리모트 서울'

cjs@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