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말저런글] 임대·임차, 위탁·수탁… 분리수거·분류배출?

연합뉴스 2025-12-25 00:00:25

제 처지에 맞춰 적절한 단어를 골라 쓰는 것은 의사소통에서 중요하다. 만일 내가 세입자라면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집은 임차한 집이다. 집주인은 내게 그 집을 임대했다. 사글세라면 매월 정해진 월세를 집주인에게 줘야 한다. 나는 일종의 임차료를 주는 거고 집주인은 임대료를 받는 거다. 반도체 생산에 관한 글에서 파운드리(Foundry)라는 용어를 본다. 외부 업체가 설계한 반도체 제품을 위탁받아 생산, 공급하는 공장을 가진 반도체 위탁 생산 업체를 말한다. 위탁받은 것을 뭐라고 하나? 수탁이다. 파운드리를 쓰고서 괄호를 이어 붙인 뒤 어떤 이는 그 안에 반도체 위탁 생산이라 쓰고 어떤 이는 반도체 수탁 생산이라 쓰는 덴 이유가 있다. 위탁이냐 수탁이냐는 맥락이 결정한다. 이게 들어맞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은 유감이다. 파운드리는 업체인데, 반도체 위탁 생산이나 수탁 생산에서 풀이가 그치는 것도 문제다.

분리수거

그 연장선에서 쓰레기 '분리수거'는 때로 '분류배출'이어야 한다는 견해에 눈길이 간다. 한 국어책(『당신은 우리말을 모른다』)에서 본 의견 요지는 이렇다. 분리수거는 환경미화원들이 하는 것이지 집에 있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종류에 따라 구분(분류)해서 밖으로 내보내(배출)는 행위를 하는 것이니까 내 처지에서 말할 땐 분류배출이 맞다. 결국 집집이 하는 것은 분류배출이고 환경미화원들이 하는 것은 분리수거라는 이야기다. 논리적으로 틀림이 없다. 내가 분리수거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자명하지 않나. 그런데 분리수거라는 말에 사람들은 너무 익숙해졌다. 내가 하는 것은 분류배출이지만 그것을 분리수거라고 되풀이하여 말하게 되는 것을 어쩌나. 원래 기표(記標. 음성 또는 소리. 시니피앙)와 기의(記意. 의미 또는 내용. 시니피에)의 관계는 자의적이라고 했던가. 기표는 기의에 침투까지 한다. 분리수거라는 기표가 분류배출이라는 기의에 침투해 "너도 분리수거야" 하는 거다. 며칠 전 임차 건물에 식당을 낸 김 사장이 친구에게 하는 말을 보면 '분류배출'이라는 단어의 앞날이 밝다고 하긴 어렵다. "월 300만 원에 임대했어(→임차했어). 임대료(→임차료) 빼면 남는 게 없어. 매일 내가 손수 분리수거(분류배출)해야 할 쓰레기가 한 트럭이고." (서울=연합뉴스, 고형규 기자, uni@yna.co.kr)

※ 이 글은 다음의 자료를 참고하여 작성했습니다.

1. 엄민용, 『당신은 우리말을 모른다(어휘 편)』, 한국교육방송공사(EBS), 2023, pp. 385-387. '집에서는 분리수거를 못 한다'

2. 이수정, 『편지로 쓴 철학사 1』, 에피파니, 2017

3. 표준국어대사전

4. 고려대한국어대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