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고장에 당근책까지…외환당국 '능력' 드러내자 환율 뚝

연합뉴스 2025-12-24 17:00:02

금융위기 때보다 셌던 구두개입…세제 인센티브도 동시 발표

달러 약세·외국인 매수도 힘 보태…"고점 인식 굳어지면 추가 하락"

계속 떨어지는 원·달러 환율

(서울=연합뉴스) 신호경 한지훈 임지우 기자 = 외환당국이 24일 이례적으로 강도 높은 구두개입과 정책 수단을 동원하며 연말 환율 상승세에 급브레이크를 걸었다.

이달 들어 외환 수급 불균형 해소 방안을 연달아 발표해온 당국은 올해 거래 마감을 나흘 앞둔 이날 시장 안정 메시지 수위를 고도로 끌어올리며 위력을 과시했다.

원/달러 환율은 약달러 흐름과 맞물려 장중 30원 넘게 급락했고, 불과 하루 전까지 기세등등하던 시장의 추가 상승 기대도 일순간 얼어붙었다.

◇ 정부, 종일 동시다발 정책 공세…국민연금 환 헤지도

기획재정부와 한국은행은 이날 서울 외환시장 개장과 동시에 "원화의 과도한 약세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내용의 구두개입 메시지를 내놨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이 언론에 "이제는 말이 아닌 행동으로 대응할 것"이라며 "오늘부터 좀 달라질 것"이라고 '변곡점'을 예고한 직후였다.

외환당국은 특히 "정부의 강력한 의지와 종합적인 정책 실행 능력을 곧 확인하게 될 것"이라며 시장을 향해 사실상의 '경고장'을 날렸다.

이는 금융위기 때 "필요하면 확실히 개입하겠다"(강만수 당시 기재부 장관), "정부 대응 능력에 의구심을 갖지 말라"(김동수 당시 기재부 1차관) 등의 발언보다도 강한 표현으로 평가됐다.

구두개입 직후에는 기재부가 해외 주식을 팔고 국내 주식에 1년간 투자하면 해외 주식 양도소득세(20%)를 1년 동안 비과세하는 방안을 발표했다.

일각에서 추가 해외 투자를 막기 위해 해외 주식 양도세를 대폭 높여야 한다는 주문이 나온 가운데 오히려 반대로 국장 복귀를 유도하기 위한 파격적인 '당근책'을 내놓은 것이다.

이와 별도로 오전 장중에는 '큰 손'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가 한은과의 외환스와프를 통해 전략적 환 헤지를 개시했다는 외신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그야말로 동시다발 정책 공세가 시장을 뒤덮은 하루였다.

정부와 한은은 앞서 선물환 포지션 제도 합리적 조정, 외화유동성 스트레스 테스트 부담 경감, 거주자 원화 용도 외화대출 허용 확대, 국민연금 관련 '뉴프레임워크' 모색 등을 발표했다.

한은은 또 다음 달부터 6개월 동안 금융기관 외환건전성 부담금을 면제하고, 외화예금 초과 지급준비금에 이자를 지급하기로 했다.

당국이 '의지와 능력'을 거론하며 존재감을 드러낸 만큼 그동안 내놓은 장·단기 환율 안정책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작동할지에 당분간 시장 관심이 집중될 전망이다.

◇ 금융위기 이후 처음 맞은 고환율…당국, 용인 어렵다 판단

당국이 이날 고강도 구두개입과 새로운 수급 개선책을 내놓은 것은 최근 환율 변동성뿐 아니라 수준 자체가 너무 높아 더 이상 용인하기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서울 외환시장에서 미국 달러화 대비 원화 환율은 지난 22일 1,480.1원에 이어 23일 1,483.6원으로 주간 거래를 마쳤다.

환율이 종가 기준 이틀 연속 1,480원을 웃돈 것은 금융위기 때인 2009년 3월 12일(1,496.5원)과 13일(1,483.5원) 이후 16년여 만에 처음이었다.

올해 연말 종가가 지난해 말(1,472.5원) 수준을 웃돌 소지가 다분해 보이는 상황이었다.

원화의 실질실효환율은 이미 지난달 말 87.1까지 하락, 금융위기 때인 2009년 4월 말(85.5) 이후 16년 7개월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환율은 이날도 전날보다 1.3원 오른 1,484.9원으로 출발해 지난 4월 9일 기록한 연고점(장중 1,487.6원) 경신을 목전에 뒀다.

달러 가치를 나타내는 달러인덱스가 4월 초 102∼103에서 최근 97∼98까지 하락한 점을 고려하면, 원화 약세가 한층 두드러진 점을 알 수 있다.

환율은 이날 구두개입 직후 계단식으로 낙폭을 키워 오후 3시 넘어서 1,440원대로까지 떨어졌다. 개장가보다 30원 넘게 급락한 셈이다.

구두개입, 정부의 세제 인센티브 발표, 국민연금 환 헤지 보도에 더해 시장 일각에서 당국의 실개입 소문까지 퍼지면서 하락 폭이 점차 확대됐다.

마침 달러인덱스도 이날 오전 11시10분께 97.744로, 지난 10월 6일(장중 97.687) 이후 최저 수준까지 하락해 환율 하락에 힘을 보탰다.

유가증권시장에서는 외국인과 기관이 '쌍끌이' 매수에 나서기도 했다.

◇ "일방적 상승세 꺾이는 국면" vs "달러 강세 땐 되돌림 가능성"

전문가들은 외환당국이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연말 환율 수준이 비교적 안정될 가능성이 커진 것으로 분석했다.

서정훈 하나은행 수석연구위원은 "정부가 강한 의지를 적시에 잘 보여줬다"며 "고점 인식이 확실히 자리 잡으면 수출업체 네고(달러 매도) 물량이 더 나오면서 빠르게 환율이 낮아질 수 있다"고 말했다.

백석현 신한은행 이코노미스트도 "크리스마스 직전으로 거래량이 크게 줄어든 상황이어서 당국이 더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며 "연말까지는 환율이 어제의 고점을 돌파할 가능성이 상당히 낮아졌다"고 평가했다.

그는 "장기적으로 환율이 상승하더라도 되돌림이 수반되기 마련"이라며 "최근 석 달간의 일방적인 환율 상승이 꺾이는 국면이 조만간 올 것"이라고 덧붙였다.

문정희 KB국민은행 수석이코노미스트는 "정부 대응이 단기적으로 환율 안정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며 "다양한 정책 수단이 병행된다면 환율 방향성 인식에도 변화가 나타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번 환율 하락이 단기에 그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왔다.

박형중 우리은행 이코노미스트는 "달러 강세나 위험 회피가 유지되면 되돌림이 나올 가능성이 있다"며 "환율을 내려야 한다는 목표에 정책이 고정되면, 시장은 오히려 당국의 방어 레벨을 추정하며 테스트하는 구도로 바뀔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최근 달러 흐름은 미국 기준금리 인하 기대가 약해지면서 달러가 강세로 전환될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한다"며 "엔 캐리 청산에 원화 약세 압력이 높아질 가능성도 있다"고 덧붙였다.

더 근본적인 환율 관리 방안을 고민해야 할 때라는 주문도 이어졌다.

서정훈 수석연구위원은 "당장의 수급 불균형 해소 대책들은 전술적 대응 측면"이라며 "장기적, 전략적 관점에서 여러 기관과의 정책 믹스가 필요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백석현 이코노미스트는 "국내 자본이 해외 투자를 확대한 배경이나 국외 자본이 국내 투자를 축소한 배경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원화 약세 흐름을 꺾기 쉽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기술 혁신을 통한 생산성 제고와 수출 경쟁력 회복, 의대가 최고라는 고정관념을 깨는 충격 등 구조적 변화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hanjh@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