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류 의견 맞서 '플랜B' 관철…폰데어라이엔·메르츠 체면 구겨
헝가리·체코·슬로바키아, 공동지원 대열서 이탈…EU 분열상 노출

(브뤼셀=연합뉴스) 현윤경 특파원 = 유럽연합(EU)이 강하게 밀어붙인 역내 러시아 동결 자산을 활용한 우크라이나 지원안이 불발되면서 이 방안을 줄곧 반대한 벨기에 총리가 주목받고 있다.
폴리티코 유럽판은 수개월간 EU의 최대 화두이던 우크라이나 지원안을 둘러싼 막전막후 상황을 19일(현지시간) 전했다. 이 매체는 이번 합의에 대해 수개월 동안 EU 절대다수 회원국의 압력과 설득에 아랑곳하지 않고 러시아 동결 자산 사용에 반대한 바르트 더 베버르 벨기에 총리의 승리라고 평가했다.
반면, 러시아 동결 자산을 활용한 우크라이나 지원을 앞장서 주장했던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 반대파 설득에 실패하고 결국 '플랜B' 합의안 도출에 그친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정치적 타격을 입게 됐다고 폴리티코 유럽판은 짚었다.
EU는 18일 브뤼셀에서 열린 올해 마지막 정상회의에서 15시간의 마라톤협상 끝에 내년부터 2년간 우크라이나에 총 900억유로(약 156조원)의 무이자 대출을 하는 방안에 합의했다.
당초 우크라이나 지원 자금을 러시아 동결 자산을 활용한 '배상금 대출'로 마련하자는 독일 등의 의견과 유럽 공동 채권 발행으로 하자는 벨기에 등의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하다가 날을 넘겨 19일 새벽 3시에야 극적인 타결을 봤다.
더 베버르 총리는 올해 2월 벨기에 총리에 올라 그동안 EU 정가에서는 그다지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최근 몇달 동안 러시아 동결자산 사용을 놓고 EU 주류에 맞서 '불가' 방침을 고수하면서 급격히 존재감을 키웠다.
독일을 필두로 폴란드, 스웨덴, 덴마크, 발트 3국 등 러시아와 인접한 EU 주류는 유럽 납세자가 부담을 지는 대신 러시아 동결 자산을 활용하는 방안을 추진했다. 그러나 러시아 동결 자산 대부분을 보관하고 있는 벨기에의 더 베버르 총리는 향후 법적 분쟁과 러시아의 보복 가능성이 있다면서 이 방안을 완강히 맞섰다.
EU 지도부와 독일 등은 앞서 지난 10월 정상회의에서도 러시아 동결자산을 활용한 방안을 무난히 타결할 수 있을 것으로 자신했으나, 더 베버르 총리의 반대로 빈손으로 회의장을 나서는 일격을 당한 뒤 전방위 설득전에 나섰다.

메르츠 총리와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은 지난 5일 밤 브뤼셀을 찾아 더 베버르 총리와 와인을 곁들인 저녁 식사를 함께하며 그의 마음을 돌리려 안간힘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프랑스, 독일 등 EU 다른 나라에 예치된 러시아 동결자산도 함께 사용해야 하고 EU 회원국 전체가 전면적인 위험을 분담하지 않는다면 응할 수 없다며 버텼다.
일각에서는 벨기에가 다수의 의견을 계속 거스른다면 EU에 사사건건 엇박자를 내는 헝가리와 같이 취급받을 수도 있다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지만 별 효과는 없었다. 더 베버르 총리는 러시아의 동결자산을 사용할 경우 벨기에가 파산에 이를 수 있다며 꿈쩍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탈리아, 몰타, 불가리아 등을 끌어들였다.
폴리티코에 따르면 18일 정상회담 시작 전까지도 더 베버르 총리를 설득하는 데 실패한 EU 지도부와 독일 등은 막상 회의가 시작되고 다수가 압박하면 결국 더 베버르 총리가 두 손을 들 것으로 기대하고 회의장에 들어섰다.

하지만 러시아의 상환 요구나 보복 등의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화하면 EU 회원국 모두가 무제한 연대 책임을 진다는 사실상 '백지수표'를 요구하는 벨기에의 조건에 분위기가 급변했다.
이번에도 차마 빈손으로 정상회의를 끝날 수 없다는 절박감을 안고 회의장에 들어온 EU는 결국 차선책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유럽의 지원금이 없으면 내년 2분기 국가 부도로 몰리는 우크라이나의 블라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이 직접 브뤼셀로 찾아와 회의 결과를 초조히 지켜보고 있었다. 게다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유럽이 쇠퇴하고 있으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나약한 지도자들이 이끌고 있다고 연일 맹공을 가하는 점도 이런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고 폴리티코는 짚었다.
자기 뜻을 관철한 더 베버르 총리는 회의가 끝난 뒤 "물론 어떤 이들은 그것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푸틴에게서 돈을 빼앗음으로써 벌을 주려 한다"며 "하지만 정치는 감정적인 일이 아니다. 결국 이성이 승리했다"고 말했다.
그의 국내 인기도 치솟고 있다. 이번 정상회의 직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벨기에 국민의 67%는 더 베베르 총리가 EU에 굴복하면 안된다고 응답하며 그에게 힘을 실었다.
최근 그가 프랑스어권인 왈롱 지역을 찾아 한 강연에서는 이례적으로 환호와 박수가 쏟아지기도 했다고 폴리티코는 전했다. 전통적으로 왈롱 지방은 네덜란드어를 쓰는 플랑드르 분리 독립을 주장해온 그에게 적대적인 지역이다.
폴리티코는 또 EU가 가까스로 합의에 이르기는 했지만 결정이 무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우크라이나 지원에 회의적인 헝가리와 체코, 슬로바키아는 공동 지원에서 제외함으로써 분열상을 노출했다고 지적했다.
ykhyun14@yna.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