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된 의미를 흔드는 언어의 숨바꼭질…나하늘 '회신 지연'

연합뉴스 2025-12-19 00:00:24

제44회 김수영문학상 수상 시집

회신 지연

(서울=연합뉴스) 김기훈 기자 = "지금 답장할 수 없다는 말은/ 쉬이 용서받기 어려운데// 그러나/ 도저히 열어 볼 수 없었다고/ 그게/ 내가 살아 있다는 뜻이라고"('회신 지연' 부분)

제44회 김수영문학상을 받은 나하늘 시인의 '회신 지연'(민음사)이 출간됐다.

독립문예지 '베개'의 창간 멤버로 2017년부터 작품 활동을 시작한 시인은 '파업 상태의 언어'와 '읽히지 않는 책'을 시적 화두로 삼아 시문을 지어왔다.

그의 시에선 이를테면 '비빔말'처럼 어딘가 잘못 쓰인 말들이 제자리를 찾아가기보다 마음껏 길을 잃는 상황이 자주 벌어진다.

단어들의 순서가 뒤죽박죽이거나, 제목부터 본문까지 군데군데 빈칸이 뚫려 있거나, 알맞은 의미를 이루는 문장을 줄을 그어가며 읽어야 하는 시들로 가득하다.

시인은 구조적으로 '읽을 수 없는' 상태를 만들고, 독자를 텍스트 앞에서 잠시 멈춰 세우며 시간을 지연시킨다.

이런 낯설게 하기를 통해 의미의 고정 점을 끊임없이 흔들고, 독자를 '언어의 파업'에 가담시킨다.

문학평론가 양경언은 시인의 '사라지기' 연작에서 효율성과 생산성의 세계에 저항하는 '급진적 수동성'의 전략을 읽어낸다.

무언가를 '하기'만을 독려하는 세상에서 '하지 않기', '사라지기'를 통해 "대항의 혁명적 언명" 노릇을 할 수 있단 것이다.

"현대인이 통신네트워크에 접속함으로써 존재를 무한히 확장할 수 있다면, 전자기기가 연장된 신체로서 나를 살고 있다면, 반대로 나를 끄고, 비활성화함으로써 나를 얼마간 축소하고 죽이는 것 역시 가능하지 않을까.// 나는 사라졌었다."('사라지기 1' 부분)

양경언은 해설에서 "부재와 사라짐, 때때로 비(非)가독성으로 대항하는 시인의 '수동적 태도'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 시스템에 말려 들어갈 가능성을 애초부터 차단함으로써 아무것도 정해져 있지 않은 '미지'를 향해 몸을 열어두겠다는 '급진적 자세'로 전환된다"고 분석했다.

나하늘의 시는 한달음에 읽히지 않는다.

독자들은 시어 앞에서 머뭇거리고 의미를 더듬게 된다. 언어의 숨바꼭질을 통해 자기 내면에 불을 비추고 숨은 의미를 탐구하게 된다.

김수영 문학상 심사위원단은 "무리한 파격으로 치닫지 않으면서도 다채롭게 전개되는 스타일에 매번 합당한 이유가 있어 보인다"고 평했다.

132쪽.

kihun@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