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든든한 뒷배' 얻은 北…트럼프 거듭된 대화 재개 의지에 침묵
李정부 선제적 긴장 완화 조치에도 北외면…복잡한 외교지형 속 남북관계 개선 난항

(서울=연합뉴스) 이은정 기자 = 지난 9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중국에서 열린 전승절 80주년 기념 열병식에 전격 참석했다.
다자외교 무대에 처음 등장한 김 위원장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베이징 톈안먼 망루에 함께 올랐다. 66년 만에 북중러 정상이 어깨를 나란히 하는 파격을 연출한 것이다.
북한의 달라진 국제적 입지를 상징하는 장면이자, '한미일 대 북중러'라는 동북아 신(新)냉전 구도를 한층 선명히 드러낸 사건으로 평가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북미 대화 재개에 시동을 걸기 위해 김 위원장에 적극적인 구애를 펼치고 있고 이재명 정부 역시 전임 정부의 대북 강경책에서 탈피해 '페이스 메이커'를 자처하고 있지만, 아직 가시적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중·러라는 든든한 뒷배를 얻은 김 위원장이 전략적 무시로 일관하는 가운데 내년 초 북한의 굵직한 정책 노선이 발표될 9차 당대회에 시선이 쏠린다.

◇ 중·러를 뒷배 삼은 북한…아세안까지 외교 영역 확장
김정은 위원장은 역대 최장인 4박 5일간의 방중 기간 '은둔의 지도자'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정상국가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부각했다.
특히 중국과 러시아가 김 위원장과 나란히 톈안먼 망루에 나선 모습은 이들이 반미라는 공통 분모 속에 북한의 핵보유를 사실상 묵인하기 시작한 것 아니냐는 해석을 낳았다.
북러 밀착에 비해 소원했던 북중관계도 회복세에 접어들었다. 김 위원장의 열병식 참석을 계기로 6년 만에 성사된 북중 정상회담에서는 '비핵화' 언급이 사라졌다.
김 위원장은 10월 노동당 창건 80주년이라는 국내 이벤트도 적극 활용했다.
중국에서는 2인자 리창 국무원 총리, 러시아에서는 푸틴 대통령의 오른팔 격인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국가안보회의 부의장 등 고위급을 평양에 파견했다.
북한은 아세안(동남아시아국가연합) 국가인 라오스·베트남의 국가수반까지 안방에 불러들여 중러 이외에도 우군이 있음을 과시했다.
평양에 모인 비(非)서방 고위 인사들이 신형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20형 등 전략무기가 대거 등장한 열병식을 지켜보는 장면은 북한의 외교적 고립 탈피를 단적으로 보여줬다. 국제사회에 제재 무용론을 확산해 '핵보유 정상국가'로 행세하기 위한 포석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 거듭된 러브콜에도…침묵으로 대답한 김정은
10월 말 열린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는 일찌감치 미·중 정상의 만남이 예고되면서 외교 '빅이벤트' 무대로 주목받았다.
김정은과의 개인적 친분을 꾸준히 언급해왔던 트럼프 대통령은 방한을 계기로 그와 만나고 싶다는 뜻을 거듭 피력했다.
마침 김 위원장은 9월 최고인민회의 연설에서 미국이 비핵화 목표를 포기한다는 것을 전제한다면 "우리도 미국과 마주서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대화 가능성을 열어 둔 터였다. 자연스레 두 정상의 2019년 판문점 '깜짝 회동'이 재연될 수 있다는 관측이 퍼졌다.
하지만 김 위원장은 트럼프 대통령의 거듭된 러브콜에 침묵으로 답했다.
당장 성과가 불확실한 미국과 대화 재개보다는 중·러와 연대를 공고히 하는 게 실익이 크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북미 대화의 불씨는 여전히 살아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은 내년 4월 중국 방문을 예고하며 이때 김 위원장과의 만남을 도모하겠다고 밝혔다. 미국을 비난하면서도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고 있는 북한은 9차 당대회에서 구체적인 대미 메시지를 공개할 가능성이 높다.

◇ 南의 유화 제스처에도 침묵하는 北…대외 정세 변수에 관계 개선 안갯속
이재명 정부는 북한이 민감하게 반응해온 대북 전단 규제, 대북 확성기 방송 중단 등 남북 관계 개선을 위한 선제적인 긴장 완화 조치에 나섰다.
비무장지대(DMZ) 내 군사분계선(MDL) 기준선 설정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남북 군사당국 회담도 제안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을 향해 "'피스메이커'를 하시면 저는 '페이스메이커'로 지원하겠다"며 북미 대화 재개에 힘을 실었다.
그럼에도 북한의 반응은 싸늘했다.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은 7월 담화에서 "서울에서 어떤 정책이 수립되고 어떤 제안이 나오든 흥미가 없으며 한국과 마주 앉을 일도, 논의할 문제도 없다"고 못 박았고, 이후 남측의 회담 제안에 무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다.
김정은 위원장은 9월 최고인민회의에서 "우리와 한국이 국경을 사이에 둔 이질적이며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는 두 개 국가임을 국법으로 고착시킬 것"이라며 '적대적 두 국가' 노선의 명문화를 예고하기도 했다.
'적대적 두 국가' 노선이 내년 초 북한 당대회에서 당 규약, 이후 이어질 최고인민회의에서 헌법에 각각 문서화되면 남북관계 공간은 더욱 좁아지게 된다.
이재명 대통령이 "바늘구멍이라도 뚫어야 한다"(11월 기내 기자간담회)고 말할 정도로 대화 프로세스 가동을 위한 정부의 의지는 크지만, 현재로선 별다른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 형국이다.
최근에는 외교안보 라인에서 대북정책 주도권을 두고 북한과의 양자 관계에 무게를 두는 '자주파'와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와 협력해서 남북관계를 풀어야 한다는 '동맹파' 간 갈등 양상까지 불거졌다.
아울러 북미대화가 가동되더라도 비핵화 목표를 유지할 수 있을지, 한국의 이해관계를 얼마나 반영할 수 있을지는 또 다른 문제라는 지적도 나온다.
ask@yna.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