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VIBE] 최만순의 약이 되는 K-푸드…작은 곡식의 큰 전략, 기장

연합뉴스 2025-12-17 12:00:05

[※ 편집자 주 = 한국국제교류재단(KF)의 지난해 발표에 따르면 세계 한류 팬은 약 2억2천500만명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또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해 지구 반대편과 동시에 소통하는 '디지털 실크로드' 시대도 열리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한류 4.0'의 시대입니다. 연합뉴스 동포·다문화부 K컬처팀은 독자 여러분께 새로운 시선으로 한국 문화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고자 전문가 칼럼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시리즈는 매주 게재하며 K컬처팀 영문 한류 뉴스 사이트 K바이브에서도 영문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기장 수확

기장(黍米)은 몸과 자연을 닮은 곡식, 한국인의 기억 속에 살아 있는 생명의 씨앗이라 할 수 있다. 가을 들녘의 햇살을 떠올려보면 벼가 황금빛으로 물들기 전, 더 먼저 바람을 가르며 익어가던 곡식이 있었다. 바로 기장이다.

오늘날 우리는 흰쌀과 밀가루를 주식처럼 여기지만, 우리 조상은 훨씬 더 오래전부터 기장을 소중한 곡식으로 여겼다. 실제로 청동기 시대 유적(예: 부여 송국리 유적)에서 불에 탄 기장 알갱이가 다량 출토될 정도다. '삼국사기'에도 기장이 제사와 의식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며, 이는 기장이 먹거리 이상의 생존과 의례, 축복의 의미를 품은 곡식이었음을 보여준다.

◇ 기장의 양생

양생에서 곡식은 탄수화물로만 볼 게 아니다. 오행(五行)으로 귀속되고, 사람의 장부(臟腑)와 기운(氣)과 연결되며, 삶의 윤리와 예절까지 품는다.

그중 기장은 오곡(五穀) 가운데 하나로 기록돼 있으며, 황토의 기운 즉 토(土)의 성질을 가장 진하게 품고 있다고 본다. '본초강목'에서는 기장이 '하늘의 기운과 땅의 기운이 균형을 이루는 땅에서 자란다'고 표현했다.

실제로 기장은 가뭄과 추위, 척박한 토양에도 강해 조선시대 빈곤층의 생존 곡식으로 불렸다. 그래서 조상들은 기장을 귀하게 여겼고, 제사·혼례·명절·성대한 잔치에 빠지지 않고 올렸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왕실 의식에서 기장밥이 정기적으로 등장하는 기록이 남아 있다.

약선에서는 기장을 속을 따뜻하게 하고 기운을 돋우는 곡식으로 표현한다.

"기장은 비위(脾胃)를 보하고, 오래 먹으면 기혈이 충만해진다."

즉, 소화기관을 보호하고 비(脾)를 강하게 해준다. 성질은 약간 따뜻하고(微溫), 맛은 달며(甘), 독이 없다(無毒). 그래서 여러 증상에 도움을 줄 수 있다. 속이 차고 소화가 약한 체질, 목이 마르고 가슴이 답답할 때, 기운이 없고 자주 피곤할 때, 설사나 소화불량이 반복될 때, 아이들의 잦은 구토나 입 안 염증 등에 도움이 된다.

더불어 동의보감에서는 화상이나 상처에 기장 가루를 바르면 낫는다고 기록했고, 실제로 약재와 식재료로 병행해 사용하도록 했다.

이 오래된 곡식 기장은 현대 연구에서도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단백질 함량은 일반 백미의 약 2배(11~13g/100g), 철분·마그네슘·아연 등 미네랄이 풍부하며, 베타카로틴·폴리페놀 등 항산화 성분도 함유하고 있다. 혈당지수(GI 50~60)는 백미(70~90)보다 낮아 천천히 에너지를 공급한다.

한국농촌진흥청 연구에 따르면 기장 껍질의 항산화 능력은 블루베리의 30~40% 수준으로 측정됐다. 따라서 다이어트·혈당관리, 수험생·노동자, 노약자·아이, 갱년기·피로누적 등에 특히 잘 맞는다. 비록 작은 곡물이지만 약재로도, 슈퍼푸드로도 존재한 식재료다.

농진청 오곡밥(조, 기장, 수수, 팥, 검정콩)

기장은 기장밥 하나만으로 먹어도 좋지만, 궁합이 잘 맞는 재료와 만나면 그 가치는 더욱 살아난다.

팥과의 조합은 기장의 담백함과 팥의 이뇨작용으로 노폐물 배출을 도와 피로를 해소한다. 강낭콩과의 조합은 단백질 균형을 맞추고 포만감을 오래 유지해 다이어트를 돕는다. 단호박과의 조합은 베타카로틴과 비타민이 기장의 미네랄 흡수를 도와 노화 방지를 돕는다. 누룽지, 떡, 꿀과의 조합은 기장의 따뜻한 기운이 더 살아 소화기관의 건강을 돕는다.

단, 누구에게나 맞는 것은 아니다. 급성 장염, 설사 중인 사람, 단백질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은 상황에 맞춰 양을 조절해야 한다.

기장을 입에 넣어보면 쌀처럼 매끄럽지 않고 약간의 거친 기억이 남는다. 그렇다고 거칠기만 한 것도 아니다. 처음엔 살짝 쌉싸름하지만 씹을수록 고소하고 깊은 단맛이 배어난다. 마치 겨울을 견디고 움트는 새싹처럼, 겉은 단단하지만 속에는 따뜻한 생명력이 숨어 있다.

기장 속에는 한국인의 삶, 철학, 건강관, 그리고 어머니의 마음이 녹아 있다.

가난했던 시절, 사랑하는 가족의 허기를 달래기 위해 정성껏 지었던 노란 기장밥. 그 한 그릇 속에는 단지 곡식이 아니라 '살아가라, 그리고 건강하라'는 기도가 담겨 있었다. 이제는 그 기억을, 다시 우리의 식탁 위에 올릴 때다.

풍요 건강을 기원하며

◇ 손자병법으로 바라본 기장의 조합

손자병법 '모공(謀攻)의 장'을 기장과 조합에 적용해봤다. 작고 누런 알갱이지만, 그 안에는 자연의 시간과 인간의 지혜가 담겨 있다.

손자는 전쟁의 최고 승리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라고 했다. 백 번 싸워 백 번 이기는 것이 최고가 아니라, 싸움 없이 상대를 꺾을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최고의 전략이라는 뜻이다.

기장을 보면 이 말이 떠오른다. 쌀이나 보리처럼 화려하거나 흔하지도 않다. 그러나 예부터 기장은 병들지 않은 곡식, 왕이 먹는 곡식, 몸을 편안하게 하는 곡식으로 불렸다. 병을 다스리기보다는 병이 생기지 않도록 미리 다스리는 것. 바로 이것이 모공(謀攻)의 정신이요, 양생의 최고 단계다.

기장의 첫 번째 지혜는 기장밥이다. 기장밥은 음식의 전선에서 정면승부가 아닌 조용한 포위전과 같다. 흰쌀 속에 한 줌의 기장을 넣으면 식감은 부드럽고, 곡식의 향은 은은하다. 몸은 소리 없이 바뀐다. 비위가 따뜻해지고, 속이 편안해지며, 소화가 잘된다. 이것은 적을 큰 소리로 공격하는 방식이 아니다. 상대를 이미 무력화한 상태에서 전투가 일어나지 않게 만드는 것. 즉, 기장밥은 몸 안의 문제를 키우기 전에 조용히 균형을 잡아주는 전략적 병법이다.

두 번째 지혜는 기장죽이다. 기장죽은 전쟁터에서의 심리전에 가깝다. 죽은 부드럽고 따뜻하며, 약할 때 먹는 음식처럼 보이지만 진정한 힘은 부드러움 속에 있다. 물 흐르듯 들어가 속을 감싸며, 갈증을 멈추고 열을 식히며, 기력을 채워준다. 손자는 부드러움은 강함을 제압한다고 했다. 기장죽의 힘은 바로 무형의 공격, 말없이 상대를 꺾는 궁극의 병법이다.

세 번째 지혜는 기장인절미다. 기장으로 만든 인절미는 병참 전략(兵站)과 통한다. 군대는 마음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좋은 보급이 있어야, 병사의 기세가 살아나고 전쟁의 흐름이 바뀐다. 기장인절미의 찰기와 단단함은 곡식의 생명성을 압축한 형태다. 한 조각만 먹어도 포만감이 오래가고, 비위가 강해지며, 원기가 저절로 차오른다. 이는 병사를 굶기지 않고, 지치지 않는 상태로 유지하는 전략적 에너지 공급이다.

네 번째 지혜는 기장국수와 기장전병이다. 기장으로 국수와 전병을 만들면, 변화에 대응하는 전술적 유연함이 생긴다. 부드럽게 끓여도 좋고, 얇게 부쳐도 좋다. 소화가 빠르고 탈이 없으니, 몸은 거친 소음을 내지 않는다. 손자는 형태는 바뀌되 원칙은 바뀌지 않는다고 했다. 조리법은 달라져도 기장의 본성은 그대로, 몸을 가볍게 하고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에너지를 유지한다.

다섯 번째 지혜는 기장 술(黃酒)이다. 기장으로 빚은 황주는 몸을 따뜻하게 하고 혈맥을 열어주는 약술이다. 술은 전쟁터에서 승리 후 사기를 올리는 의식이자, 장군의 판단을 흐리지 않는 절제의 상징이었다. 기장술은 취하게 하는 술이 아니라, 몸의 냉기를 몰아내고 기운을 펴주는 술이다. 이는 기쁨으로 마음을 다스려 치유하는 심리적 모공(謀攻)이다.

관광객 사로잡은 기장

기장은 다른 곡식에 비해 작다. 그러나 작은 것이 약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손자는 전쟁은 먼저 이기고 나서 싸운다고 했다. 즉, 미리 준비된 자만이 싸움 없는 승리를 얻는다. 기장은 바로 그런 곡식이다. 큰 병을 막기 위해 먹는 것이 아니라, 병이 생기지 않도록 미리 다스리는 음식. 몸의 흐름을 정돈하고, 마음을 안정시키며, 삶의 속도를 조절하게 만든다.

그러니 기장은 양생의 모공(謀攻)으로 건강의 전략이며, 삶에서 싸우지 않고 이기는 지혜다. 오늘 밥상에 기장을 올리는 일, 그것이 곧 저속노화를 만드는 가장 지혜로운 선택이다.

최만순 한국전통약선연구소장

최만순 음식 칼럼니스트

▲ 한국약선요리 창시자. ▲ 한국전통약선연구소장. ▲ 중국약선요리 창시자 팽명천 교수 사사 후 한중일 약선협회장 역임.

<정리 : 이세영 기자>

seva@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