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호 "'힙'한 문화 된 시인선…문지 브랜드는 독자의 힘"

연합뉴스 2025-12-16 12:00:11

창사 50주년 문학과지성사 대표…지성으로 일군 "문학적 우정의 공동체"

실용·자기계발서 없이 출판 명가로…작가 요람이자 '시인의 왕국'

이광호 문학과지성사 대표

(서울=연합뉴스) 김기훈 기자 = "아버님(문학평론가 이재철)이 문학 쪽에 계셨는데, 고등학교 땐 문학을 하지 않으려고 이과를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이과에 소질이 없다는 걸 깨닫고 대학은 문과로 진학했죠."

부친의 문학적 자기장(磁氣場)을 벗어나려던 청년은 결국 문학의 세계에 이끌렸다. 어쩌면 숙명이었는지도 모른다.

고려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8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비평 활동을 시작했다.

한국 문학의 출판 명가 문학과지성사(문지) 대표이사가 된 문학평론가 이광호(62)의 이야기다.

이 대표는 1999년 계간 '문학과사회' 편집동인으로 문지에 합류했고, 서울예대에서 후학을 길러내다 2017년 교수직을 내려놓고 문지 대표가 됐다.

문지 창사 50주년을 맞아 지난 15일 서울 마포구 서교동 문지 사무실에서 이 대표를 만났다.

이광호 문학과지성사 대표

◇ 1975년 출발한 문지…창비와 70∼80년대 한국문학 양대 축 이뤄

이 대표가 문학에 발을 들인 건 대학에 들어가서부터였다.

1980년대 대학에 다닌 그는 "암울했던 시대에 문학을 한다는 데 대한 죄의식과 압박감이 있었다. 아무래도 문학과 사회와의 관계에 대해 고민을 안고 문학을 공부하게 됐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특히 문지의 책을 읽으며 비평의 세계에 어섯눈을 떴다.

그는 "인문·지성을 통해 사회에 개입하고 비판한다는 게 굉장히 중요한 일이었다"며 어떤 정파나 진영과도 비판적 거리를 둔 문지의 책들이 큰 영향을 줬다고 돌아봤다.

문지는 1970∼80년대 창작과비평(창비)과 함께 한국 문학의 양대 축을 이뤘다.

1975년 이른바 '4K'(김현·김치수·김병익·김주연)가 세운 문지의 뿌리는 1970년 창간된 계간 '문학과지성'이었다. 문지는 사회에 대한 비판 정신을 잃지 않으면서도 문학의 밀도와 미학적 측면에 집중했다.

앞서 1966년 창간된 계간 '창작과비평'이 민중·민족문학론을 내세워 현실참여를 주창한 것과는 차별화된 지점이었다.

이 대표는 문지의 지적 풍토에 대해 "엄격한 지성주의와 함께 문학적 감수성에 대한 존중, 새로운 문학이나 미학에 대해 열려 있는 태도가 공존했다"고 설명했다.

문학과지성사를 세운 이른바 '4K'

◇ 계간 '문학과지성' 폐간과 복간…지주회사 체제 전환

그는 문지라는 "문학적 우정의 공동체"를 만든 역사적 사건으로 두 가지 장면을 꼽았다.

하나는 1980년 신군부에 의해 폐간된 계간 '문학과지성'이 1988년 '문학과사회'로 복간한 때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계간지 복간이 가능해졌지만, 문지 1세대 동인들은 기득권을 버리고 젊은 비평가들에게 새로운 계간지 창간의 길을 열어줬다. 이런 전통은 현재 5세대 동인까지 이어지고 있다.

다른 하나는 2013년 45명의 주주가 지분을 모두 양도해 문지문화협동조합 지주회사를 만든 일이다. 이로써 조합원들은 1인 1표제로 정치적 권리만 갖고 경제적 지분은 모두 내려놓게 됐다.

이 대표는 "외형은 주식회사지만 개인적 지분을 가진 주주가 없는 아주 독특한 공동체적 구조를 갖게 됐다"며 이런 구조가 문지의 지적 전통을 세운 물적 토대가 됐다고 했다.

"문지는 그런 조직이기 때문에 어떤 한 개인의 이윤의 축적을 위해 노력하지 않습니다. 자본이 축적돼도 그 축적은 새로운 책을, 좋은 책을 만드는 데 쓰게 되는 것이고, 좋은 책이지만 판매가 보장되지 않는 책도 만들 수 있는 것이죠."

계간 '문학과지성' 창간호

◇ 최인훈·조세희·한강 등 작가의 요람이자 '시인의 왕국'

그렇게 문지는 실용서나 자기계발서 없이 50년 동안 명맥을 유지해왔다.

문지를 통해 최인훈, 이청준, 조세희, 한강 등이 한국 문학사에 이름을 새겨 넣을 수 있었다. 편집 동인들도 활발한 비평 작업을 통해 문학계에서 발언권을 확대해갔다.

무엇보다 문지의 빼놓을 수 없는 성취는 600호를 훌쩍 넘긴 '문학과지성사 시인선'이다.

1978년 황동규의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로 시작해 이성복의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 황지우의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기형도의 '잎속의 검은 입', 최승자의 '이 시대의 사랑' 등이 시인선을 장식했다.

"소설과 비교하면 독자층이 작지만 한국에 시집 독자가 있다는 것, 그리고 시에 관심을 가진 새로운 세대가 끊임없이 나온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에요."

이 대표는 "문지 시인선은 헤리티지(heritage·유산)를 존중하지만, 그 안에 새로운 세대에 맞는 취향이 섞여들고 있다"며 "젊은 독자들이 그 헤리티지를 낡았다고 생각하지 않고 '힙하다'고 여긴다. '텍스트 힙'이 문지 시인선을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시대가 변했고 독자들도 변했다"며 "독자와의 접점을 늘리기 위해 새로운 감수성과 언어문법을 지닌 작가들을 발굴해야 한다"고 열린 자세를 강조했다.

그는 "문지라는 브랜드를 지켜준 것은 결국 독자"라며 "문지 50년은 한두 사람의 노력이기보다는 결국은 독자들의 힘이었다"고 말했다.

이광호 문학과지성사 대표

◇ "제2의 노벨상 나오려면 문학·출판시장 다양성 필요"

한국출판인회의 회장이기도 한 그는 문학과 출판 시장의 다양성도 강조했다.

이 대표는 "'문학과사회'로 등단한 한강 작가는 굉장히 독특한 작가였다"며 "하지만 가장 많이 팔리는 작가도 아니었고 한국 문단에서 가장 권위 있는 작가도 아니었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꾸준히 책을 낼 수 있었기에 그의 작품이 눈 밝은 독자와 훌륭한 번역자를 만날 수 있었고, 결국 노벨문학상 수상이란 성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특별한 개성을 지닌 작가가 있다면 당장 읽히지 않아도 다음 책을 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다양성이 보장되고, 제2의 노벨문학상도 나올 수 있는 것이죠. 한강처럼 잠재력을 가진 작가들이 계속 글을 쓸 수 있도록 사회적 인식의 전환과 정부의 지원이 필요합니다."

kihun@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