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분투칼럼] '네 잘못 아니야…사회적 신뢰가 부족한 거야'

연합뉴스 2025-12-16 09:00:04

이현정 한국수출입은행 대외협력기금(EDCF) 카이로 소장

이현정 한국수출입은행 대외협력기금(EDCF) 카이로 소장

[※ 편집자 주 = 연합뉴스 글로벌문화교류단이 국내 주요대학 아프리카 연구기관 등과 손잡고 '우분투 칼럼'을 게재합니다. 우분투 칼럼에는 인류 고향이자 '기회의 땅'인 아프리카를 오랜 기간 연구해온 여러 교수와 전문가가 참여합니다. 아프리카를 다양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분석하는 우분투 칼럼에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기대합니다. 우분투는 '당신이 있어 내가 있다'는 뜻의 아프리카 반투어로, 공동체 정신과 인간애를 나타냅니다.]

아프리카도 모바일머니, 인터넷 상거래, 배달앱이 발달했다. 2017년 초 처음 탄자니아에서 근무했던 초기, 한국에 있던 딸이 보낸 우편을 받지 못해 불평한 적이 있다. 당시 현지 부임 3년 차인 다른 공공기관 소장이 "우편은 유료 우편사서함, 지인을 통한 전달, 또는 비싼 국제특송으로만 받을 수 있다"고 알려줬다. 이어 그는 "탄자니아 집 주소로 국제우편을 보낸 것 자체가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탄자니아 집 주소는 도로명 다음에 건물주가 임의로 붙인 비공식 건물 이름이 표시되어 있고 별도의 우편 주소 체계가 없었다.

예를 들면 서울 중앙우체국의 주소는 '서울특별시 중구 소공로 70'이다. 그러나 아프리카 대부분의 국가는 '서울특별시 중구 소공로' 정도로만 위치를 표시한다. 소공로는 남산3호터널 북쪽 입구에서 서울시청까지 이어지는 943m의 도로이다. 도로명 주소 '소공로'를 검색하면 168건의 다른 세부 주소가 조회된다.

주소 체계가 발달한 한국과 비교하자면, 아프리카 국가는 이 168개가 모두 같은 주소를 쓰는 상황에 가깝다. 이런 상황에서 집으로 배달받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대부분의 아프리카 국가는 우편배달 제도가 없기 때문에 일반인들은 우편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기업이나 관공서는 유료 사서함을 이용한다. 아프리카의 이런 상황을 모르고 오랫동안 우편을 기다린 필자의 착오였다.

정확한 배달 주소가 없는 국가에서 배달앱이 발달한다는 사실을 처음에는 쉽게 이해하기 어려웠다. 배달앱을 자주 사용하던 한 주재원에게 어떻게 위치를 알려주는지 물었다. 그는 자기 집 맞은편에 현지인에게 유명한 클럽이 있는데, 배달 주문 시 '유명한 클럽 건너편 하얀 대문 건물'이라고 설명하면 배달원이 근처에 도달했을 때 연락을 준다고 했다. 연락받으면 문밖에 나가 배달원을 직접 만나 물건을 받는 방식이다.

이후 탄자니아, 가나, 이집트 주재원으로 근무하면서 여러 배달앱을 자주 사용했다. 편리한 면이 있지만 배달 시간에 맞춰 배달원을 제대로 만나지 못할까 항상 조금씩 긴장했다. 결국 배달원이 집을 찾지 못해 돌아간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러면 반품, 환불 절차를 시작해야 하는데 그 과정을 생각하는 순간부터 걱정이 앞선다. 아프리카 국가들의 배달 앱들도 반품 및 환불 절차를 소비자 입장에서 점차 개선하고 있지만, 반품과 환불은 기본적으로 사회적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만큼 한국처럼 원활하게 진행되기는 어렵다.

얼마 전 아마존 이집트 온라인몰에서 검정 원피스를 구매했다. 크기가 너무 커서 사이트를 통해 반품과 물건 회수를 신청했다. 반품 예정 날짜를 선택하니 지정할 수 있는 시간은 '오전 8시∼오후 10시'뿐이었다. 하루 14시간 중에 언제 회수원이 올지 알 수 없어 기다리던 중 잠시 회의를 마치고 오후 4시쯤 휴대전화를 확인하니 오후 3시30분쯤 모르는 번호로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다. 바로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해당 쇼핑몰 웹사이트에 접속했더니 이미 '부재중으로 물건 회수 실패'가 표시돼 있었다.

그래서 다시 반품 회수를 신청했다. 이후로도 3일 동안 같은 상황이 반복됐다. 그러던 어느 날 오후 5시경 갑자기 회수원에게 전화가 왔고 집 앞에 도착했으니 물건을 가지고 나오라는 안내를 받았다. 그런데 회수원은 필자에게 하루 14시간 중 언제라도 전화 받아야 했는데 그렇지 않아 여러 차례 연락하느라 본인이 고생했다고 말했다. 상황을 설명할 기회가 없기 때문에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아프리카 탄자니아 지도

탄자니아 근무 당시 한 인턴이 주말을 이용해 빅토리아 폭포를 다녀오겠다고 했다. 귀국 비행편이 없어 아침 6시에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출근할 예정이라고 미리 알려왔다. 돌아오는 항공편은 짐바브웨 하라레 경유 일정이었다. 하라레에서 환승하려고 내리니 탄자니아행 비행기가 취소됐고, 다음날 비행편을 타라는 안내방송을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해당 항공사 카운터에 가서 출근 일정 때문에 다음날 비행편을 탈 수 없는 상황이니 다른 항공사를 이용할 테니 일부라도 환불해 달라고 요청했다. 카운터 직원은 일부 환불이 가능하다고 확인해줬다.

인턴은 탄자니아에 복귀한 후 약 두 달 동안 여러 차례 환불받기 위해 해당 항공사를 찾아갔다. 그러나 매번 "환불은 시일이 걸리니 기다려달라"는 답변만 듣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인턴이 더는 기다리기 어렵다며 환불 절차가 어디까지 진행됐는지 증빙을 요청했다. 그러자 창구 직원이 갑자기 표정을 바꾸며 "당신 잘못으로 비행기를 놓친 것인데, 부당한 요구를 한다"는 식으로 말하며 인턴을 내보냈다. 인턴은 환불해주겠다는 약속을 믿고 기다린 자신을 자책할 수밖에 없었다.

아프리카 가나 지도

필자 역시 가나 주재원 당시 계획했던 나이지리아 여행을 취소한 적이 있다. 항공사 약관에 따로 환불 요청 서류를 제출했고, 그 항공사를 여러 차례 찾아가 환불 진행 상황을 문의했다. 하지만 문의할 때마다 이미 제출한 서류를 다시 요구했고, 매번 서류를 모두 제출했음에도 기다리라는 말만 들었다. 결국 반년이 지나 환불을 포기했다. 6개월간 계속 찾아다닌 후 포기하면서 이런 상황을 만든 것과 여러 차례 시도했던 필자 자신을 돌아보게 했다.

한 번은 탄자니아의 한 쇼핑몰 주차장에서 키오스크에 현금을 넣고 주차권이 자동 발급되기를 기다렸다. 잠시 정전이 발생해 기계가 재작동 됐지만 주차권이 나오지 않았다. 마침 주차요원이 바로 옆 있어 "내가 주차비를 기계에 넣었고, 주차권이 나오지 않는 것을 당신이 직접 목격했으니 차단기를 열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주차요원은 그것은 개인 사정이고 정산권 없이는 차단기를 열어줄 수 없다고 했다. 기계 오류였지만 정산권이 없다는 이유로 주차비를 내지 않은 것으로 처리하려는 태도에 당황스러웠다.

현지인들은 이런 상황에 익숙하다. 대체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였다. 제출한 서류를 다시 제출하라는 요청, 이유나 설명 없이 새로운 서류를 추가로 제출하라는 요청, 승인 날 때까지 2∼3개월이 걸리니 필요하면 매일 확인하라는 안내, 어제 요구한 것과 오늘 제출해야 할 서류가 달라지는 상황, 부당한 결제에 대해 변경이나 환불을 요구하면 그것을 몰랐던 본인의 문제라는 안내 등을 일상적으로 듣는다. 이런 응대를 여러 차례 마주하다 보면 변경·취소·환불의 사정이 누구에게나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을 설명하다가 지쳐 포기하게 된다.

유명한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상호 간 신뢰가 단순한 미덕이 아니라,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의 한 형태라고 말했다. 신뢰가 약한 사회는 협력과 창의적 활동이 제약되고, 신뢰가 강한 사회는 자율적 협업과 경제적 성장이 촉진된다고 했다. 아프리카 국가들과 한국을 오가는 필자에게 한국은 아프리카 국가들과 대비되는 고신뢰 사회다.

판매자는 구매자인 나의 실수가 아니라는 것을 굳이 증명하지 않아도, 일단 믿어 주고 교환·반품·환불 신청이 어렵지 않도록 지원해준다. 필자는 공지된 절차대로 교환·반품·환불이 이뤄질 것이라고 믿는다. 대부분은 내가 진행 상황을 직접 확인하지 않아도 예상대로 처리된다. 이런 사회적 신뢰는 거래 비용을 줄이고, 사회 전반의 지속 가능성과 창의적 성장을 뒷받침하는 기반이 된다. 아프리카 국가에서도 점차 이러한 사회적 신뢰가 구축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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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현정 소장

현 한국수출입은행 EDCF(대외경제협력기금) 이집트 카이로 사무소장, 서강대 영어영문학과 졸업, 서울대 글로벌 MBA, 세종대 국제개발협력학 석사, EDCF 탄자니아 사무소장(2017), 경협사업1부 팀장(2020), EDCF 아프리카부장(2021). EDCF 가나 사무소장(2022)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