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거장 차이밍량 감독 "'행자' 11번째 작품 전주서 찍을 것"

연합뉴스 2024-05-04 00:00:30

'행자' 연작 특별전 열린 전주국제영화제 참석해 기자회견

"상업영화 구속 벗어나 '행자' 연출…한국 드라마 '더 글로리' 재밌게 봐"

전주국제영화제 찾은 차이밍량 감독

(전주=연합뉴스) 이영재 기자 = 세계적인 거장인 대만의 차이밍량(蔡明亮·67) 감독은 영화의 경계를 뛰어넘는 혁신적인 스타일로 유명하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게 '행자' 연작이다. 그가 2013년 상업적 방식의 영화를 더는 만들지 않겠다고 선언한 무렵부터 약 10년간 잇달아 내놓은 작품으로, 붉은 승복을 입은 행자를 주인공으로 한다.

차이밍량 감독의 페르소나인 배우 리강셍(李康生)이 연기하는 행자가 대만 타이베이를 시작으로 홍콩, 말레이시아 쿠칭, 대만 좡웨이, 프랑스 파리, 마르세유, 일본 도쿄, 미국 워싱턴 DC에 이르기까지 세계 각국 도시를 맨발로 느리게 걷는 모습을 담고 있다. 행자는 중국 고전 '서유기'의 삼장법사를 모티브로 한 캐릭터다.

대사라고 할 만한 것도 없고, 사건도 없다. 정지한 것으로 보일 만큼 극도로 느리게 움직이는 행자와 그 주변을 지나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관객은 마치 행위 예술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지난 1일 개막한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선 차이밍량 감독의 '행자' 연작 10편을 선보이는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행자' 연작을 한자리에 모아 상영하는 건 세계적으로 처음이다.

차이밍량 감독이 '행자' 연작의 11번째 작품을 전주에서 촬영하기로 했다.

전주국제영화제에 참석 중인 차이밍량 감독은 3일 전주의 한 호텔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전주에서 11번째 '행자' 연작을 촬영할 기회가 주어져 신기한 기분"이라며 웃었다.

그는 "어떻게 찍을지는 모르겠지만, 매우 재밌고 좋은 작품이 나올 거라고 믿는다"며 "천천히 전주를 둘러볼 것"이라고 말했다.

차이밍량 감독이 '행자' 연작의 다음 작품 촬영지로 전주를 선택한 건 그와 리강셍이 이번에 정준호·민성욱 전주국제영화제 공동 집행위원장 등과 함께 식사하다가 떠오른 아이디어라고 한다. 전주국제영화제와 협업으로 '행자' 연작의 11번째 작품 제작을 추진하기로 한 것이다.

전주국제영화제 특별전 '행자 연작'

차이밍량 감독은 기존 영화와는 확연하게 스타일이 다른 '행자' 연작을 연출한 계기에 관해 "상업영화에선 (창작에 대한) 제한이 너무 많았다. 나처럼 자유를 추구하는 감독에겐 점점 구속으로 다가왔다"며 "뭔가 새로운 방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활로를 찾던 차이밍량 감독이 주목한 게 과거 자신의 연극 작품에서 리강셍이 선보인 느린 걸음이었다고 한다. 차이밍량 감독은 "리강셍의 느린 걸음을 광고 영상으로도 찍었는데, 그때 '이게 나의 새로운 시작이 되겠다'고 생각한 것"이라고 했다.

그는 '행자' 연작의 메시지에 관한 질문엔 "관객이 내 영화에서 뭔가 다른 느낌을 받길 바란다"며 "처음엔 익숙하지 않을 수 있지만, 두 번, 세 번 접한다면 아마도 관객 자신의 존재가 진실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답했다.

영화의 경계를 뛰어넘는 차이밍량 감독은 영화관이라는 공간도 뛰어넘는다. 자기 작품을 미술관에서도 즐겨 상영해온 그는 "미술관에선 한 그림 앞에 서서 한 시간 이상 바라보는 사람도 있다"며 "영화의 좋은 관객은 미술관에서 양성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차이밍량 감독은 "영화라고 하는 건 다른 어떤 것도 대체할 수 없는 특징을 가진다. 바로 큰 화면의 구도로 볼 수 있다는 것"이라며 "관객들에게 영화관의 중요성을 알려주고 싶다"고 했다.

1992년 데뷔한 차이밍량 감독은 '애정만세'(1994)로 베네치아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받으며 세계적으로 주목받았다. 국내 개봉한 작품은 많지 않지만, 전주국제영화제와 부산국제영화제에 참석하며 관객들과 소통해왔다.

차이밍량 감독은 좋아하는 한국 영화나 드라마가 뭐냐는 질문엔 영화와 드라마를 많이 안 본다면서도 "주변에서 하도 재밌다고 하는 한국 드라마가 있길래 본 적이 있다. 그게 바로 '더 글로리'"라며 "관객들이 좋아할 만한 요소가 많았고, 나도 재밌어 처음부터 끝까지 다 봤다"고 털어놨다.

이어 "가끔 이창동 감독의 작품도 다시 보곤 한다"며 "한국엔 우수한 감독이 많고, 배우는 더 많다"고 덧붙였다. 좋아하는 배우로는 윤여정을 꼽았다.

리강셍은 일본이나 중국 영화보다도 한국 영화를 많이 본다고 말했다. 그는 '행자' 연작 촬영의 에피소드에 관한 질문에 "(느리게 걷는 게) 너무 힘들고 다리마저 떨려 감독이 '컷'을 외쳐주길 바라는데 그렇게 해주는 법이 없다"고 해 기자회견장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차이밍량 감독과 리강셍은 오는 4일 전주의 한 영화관 앞에서 열리는 '행자 퍼포먼스 콘테스트'에도 심사위원으로 참석할 예정이다. '행자' 연작의 행자처럼 천천히 걷는 사람을 뽑는 이벤트다.

'행자' 연작 중 '곳'(2022·왼쪽)과 '무소주'(2024)

ljglory@yna.co.kr